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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 11-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흐르는 눈물을 보십시오. 예레미야 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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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하나님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이 탄식은 예레미야서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강력합니다.
깨고 부수고 버리라고 말씀하시죠.
그 방법으로 고난과 아픔, 멸망과 재난이 동원됩니다.
한마디로 체벌이 가해지는 것이죠.
마치 부모가 자식을 체벌하듯 말이죠.

최근에 정부가 아동 정책에 관한 법률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는데요.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민법 추진 방침이었습니다.
민법에는 자녀에 대한 친권자의 징계권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조항에서 체벌을 제외하는 방향으로 법률이 개정될 방침입니다.
아무리 훈육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체벌은 안 된다는 뜻이죠.
이 때문에 소위 '사랑의 매'라는 단어가 사라질 전망입니다.

이는 곧바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자율적 훈육권을 침해한다는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체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들도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훈육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체벌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민법 개정을 찬성합니다.
이유는 부모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더 엄밀히 사람의 불완전성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안의 불완전한 감정은 자녀를 향해 훈육과 폭력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저는 평생 딱 한 번, 어머니에게 맞아보았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인데요.
물론 제 나름대로의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결과적으로 속인 것이 된 거죠.
그때 어머니는 회초리를 가지고 제게 체벌을 하셨는데요.
저 한 번, 어머니 한 번을 번갈아가며 때리셨어요.
당신의 잘못도 크다면서 그러신 거죠.
어머니는 저에게보다 자신에게 회초리를 휘두를 때 훨씬 세게 휘두르셔서
어머니 종아리에는 금세 시뻘건 줄이 그어졌습니다.
저는, 제가 맞아 아픈 것보다 어머니의 다리에 그어진 빨간 줄무늬가 훨씬 더 아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때리는 어머니의 심정이 맞는 나보다 더 큰 상처일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이 그런 거죠.

용서하는 사람이 훨씬 더 아픕니다.
봐주는 사람이 훨씬 더 힘들고요.
이해해 주는 사람이 훨씬 큰 짐을 지는 것입니다.
받은 상처와 아픔을 다 짊어져야 용서가 되고,
이미 있던 일을 없던 일로 자신이 감수해야 봐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는 행동,
눈 뜨고 보기 어렵고, 듣기조차 힘든 일들을 다 받아주어야 하죠.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때론 쓴소리, 아픈 말을 전하며 돌아오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남을 위해 말하는 이들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해주지 못하면 어쩌나?"
"쓴소리에 귀를 닫고 나를 떠나면 어쩌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떠나도 그만, 내 소리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전하는 쓴소리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자기만족, 자기를 위한 쓴소리일 뿐일지도 몰라요.
진정 누군가를 위해 말하는 사람은 늘 두려움을 느낍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두려워했듯이 말이죠.
많은 선지자가 백성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듯 말입니다.

매를 들어야 하는 자의 아픔이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제게도 심한 아픔이 있습니다.
그냥 좋은 소리 하고 끝내고 싶을 때가 많아요.
잘하고 있다고 위로하고, 칭찬과 격려로 마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시는 말씀은 늘 아픈 말씀입니다.
이때, 주어지는 고통이 있어요.

오늘 본문, 1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 소리가 들려 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온다.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주님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요동칠 만큼 어찌할 바를 몰라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창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메에'입니다.
원문에는 '메에 메에'라고 두 번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을 말하면 강조가 되는 히브리어의 특성에 따라
이 본문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드러내죠.
단장의 아픔.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마태복음 9:3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마가복음 1: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이외에 수없이 많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헬라어 단어는 [스플랑크논]인데요.
이 단어의 원뜻이 '창자'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뜻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하는 말이죠.
이것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이자 마음입니다.

회초리는 아픕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재난은 무섭고요.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회초리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 마음을 읽어보셨습니까?
오히려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기를 결정하시는 그 아픔을 느껴보셨습니까?
신앙은 눈앞에 놓인 현실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흐르는 눈물,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읽는 것으로 세워져요.

경고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경고의 메시지를 주시는 하나님은 더 괴롭습니다.
자녀에게 매를 드는 부모님의 마음이 더 아프듯이 말이죠.
우리가 돌아서는 것은 맞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서는 것은 아파서도 아니에요.
오직 그분의 마음을 알 때입니다.
나보다 더 아픈 마음, 애잔하고 큰 고통의 마음을 알 때
비로소 우리가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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