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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로마서묵상

로마서묵상26] 고통이 없는 역사는 없고, 눈물이 없는 기적은 없으며, 슬픔을 머금지 않은 은혜는 없다.(롬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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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없는 역사는 없고, 눈물이 없는 기적은 없으며, 슬픔을 머금지 않은 은혜는 없다.

 

 

 

 

1993년 한겨울에 나는 중국땅을 처음 밟았다. 그것도 가장 북쪽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아직 동토의 땅, 사회주의 국가의 두려움이 가득한 중국을 향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한참을 갔을까 곧 도착한다는 아나운스먼트에 창밖을 보았다. 그야말로 망망한 벌판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하얀 눈이 내린 벌판은 비행기 상공에서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있는 옷을 다 끼어 입어도 온 몸이 떨리는 추위를 무릎 쓰고 나는 중국에서의 첫 주일을 한족교회에서 보냈다. 숙소에서 차로 한 시간은 족히 가서야 도착한 그 교회는 그냥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있는 그야말로 시골집이었다. 들어가 보니 방은 세 개정도 있는 크기의 집인데 예배를 위해 방문들은 다 뜯어 놓았고, 방과 방 사이의 벽은 구멍을 뚫어 놓은 곳도 있었다. 사전에 인지한 예배시간보다 30분정도 일찍 도착했지만 나는 예배시간을 잘못 알았는 줄만 알았다. 왜냐하면 이미 그곳 방들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찬송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시간을 잘못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교인들이 일찍 왔을 뿐이다.

 

나는 그 열기에 너무 놀랐다. 그 좁아터진 곳에 대충 200명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인원이 쉴틈 없이 앉아 있었고, 들어서자 열기로 인해 나의 안경은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온갖 문이란 문은 다 열려 있기 때문에 찬 공기와 추위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 속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하는 듯 했다. 계속되는 찬양 속에 설교자로 보이는 여자 분이 단상에 올랐다. 물론 단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설교가 시작되는 것 같았다. 특이한 것이, 교인들은 설교가 시작될 무렵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각자의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고, 설교를 한 자라로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적는 모습이 보였다. 설교는 한 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나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만 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울고 있었고, 교인들 또한 이곳저곳에서 아멘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눈물은 나에게도 눈물이 되었다.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나도 설교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역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 실감케 하는 시간이었다.

 

이 후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중국교회의 특징 하나를 꼽으라면 그들의 예배시간이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해진 예배시간보다 대략 한 시간 정도는 일찍 모인다. 그리고 누가 인도한다 할 것도 없이 때론 함께 성경을 읽고, 때론 함께 찬송도 부르며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에게는 교회버스도 없다. 몇 십 킬로씩 걸어오는 교인은 태반이고, 그들 교회에는 좋은 음향시설도, 좋은 의자도, 좋은 시스템도 아니지만 가득찬다. 그들은 어찌 보면 불편해 보이는 교회에서 행복했고, 소중히 여겼다. 그 이유를 나는 나중에 알았다. 그들의 교회에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고통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고통이 있는 삶은 마치 저주 받은 삶처럼 여긴다. 가능하면 고통이 없이, 가능하면 아픔이 없이, 가능하면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이 살아가길 소망하고 꿈꾼다. 그것이 행복인줄 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역사는 없다. 눈물이 없는 기적은 없다. 슬픔을 머금지 않은 은혜는 없다. 고통이 있기에 기도하며, 아픔이 있기에 치유하고, 슬픔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 선다.

 

눈물이 없는 자는 사랑도 없는 것이다. 눈물이 없는 자는 긍휼도 없다. 눈물을 배워야 한다. 눈물의 메시지만이 변화를 가져오고, 눈물의 증거만이 영혼을 얻을 수 있다. 목자에게 잃어버린 양에 대한 아픔이 없으면 그 양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잃어버린 우리 영혼을 향한 눈물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의 긍휼하심과 기다리심을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고통이 사역이 되고, 우리의 아픔이 내미는 손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눈물을 머금은 기도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사역이 눈물을 머금은 사역이 되어야 한다.

 

바울에게 있은 큰 고통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바로 우리에게 은혜이듯 나의 눈물과 고통의 손길이 누군가의 축복이 된다. 내 영혼의 눈물을 사랑하고 내 영혼의 고통을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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