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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51 - 우리의 체통은 그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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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6~23   주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 밖을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주님 앞에서 뛰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겼다. 그들이 주님의 궤를 들어다가, 다윗이 궤를 두려고 쳐 놓은 장막 안 제자리에 옮겨 놓았을 때에, 다윗이 주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복을 빌어 주고, 그곳에 모인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각 사람에게, 빵 한 덩이와 고기 한 점과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 온 백성이 각각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이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궁전으로 돌아가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옵니다. 이는 여러 의미로 가슴 벅찬 일이죠. 일단 빼앗겼던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드디어 완전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을 거예요. 언약궤는 하나님과 약속의 상징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기반이었죠. 게다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정말 어렵사리 다윗 성에 안착하는 순간이죠.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였을까요? 다윗은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아마도 매우 흥분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이 광경을 본 다윗의 아내 미갈의 전언에 의하면 다윗이 춤추는 행동으로 인해 몸이 드러났다고 하니 그의 춤이 조금은 과격(?)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죠. 그런데 이 구절을 두고 많은 이들은 다윗의 바지가 벗겨지도록 춤을 췄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아마도 미갈이 다른 신하들의 아내들이 보고 있는 것이 민망하다는 이야기를 유추해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 유추가 가능은 하지만 이 장면에서 그 부분이 유독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유감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미갈이 다윗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이유가 그의 옷이 벗겨졌기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녀는 다윗이 춤추는 그 자체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춤에 대한 반박으로 곁들인 것이 몸이 노출되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첨언입니다. 제 생각에는 노출이 심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이를 두고 바지가 벗겨질 정도로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는 해석은 그리 타당하지도 않고, 또한 예배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해석 또한 과도하다는 생각이에요. 오히려 다윗 성으로 입성하는 하나님의 궤의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고 경건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규칙에 맞춰서 행진했던 것 같아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여섯 걸음씩 걸으며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행진은 진행되었습니다. 마치 삼보일배를 하듯 행진을 한 것이죠. 이런 와중인데 정신을 놓고 춤을 출 수는 없잖습니까? 다윗은 모든 기쁨을 다했을지언정 정신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을 거예요.

 

제가 다윗의 춤이 기쁨에 겨운 황홀경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미리 이런 자락을 까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미갈의 시선입니다. 미갈은 왜 다윗이 춤추는 것이 눈에 거슬렸을까요? 다윗이 옷이 벗겨져서요? 아닐 겁니다. 이 분위기가 춤을 추어야 할 분위기라는 사실을 자신도 인정했다면 그 춤으로 인해 옷이 흩트러진들 분명 용서가 되었을 거예요. 춤을 추다 보면 예상치 못한 동작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미갈은 그 사실을 트집 잡습니다. 왜 그럴까요? 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춤추는 것이 싫었던 것이죠. 저는 이를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는 것까지 못마땅했다고 확대 해석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녀에게 언약궤의 입성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없었다고 단정하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남편 다윗의 춤이 못마땅했음은 분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 자신이 이미 재가해서 잘 살고 있는데 마음 떠난 전 남편에게 강제로 돌아오게 되어서 일까요?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다윗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요? 보통 철없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한숨 정도일까요?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마음인지, 어떤 자세인지 가늠할 길 없어요. 그 속내를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 미갈 자신도 자신의 감정이 어떤 부분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알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꼬집을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미갈이 직접 말한 '체통'에 관한 것입니다.

 

미갈은 아마도 왕에 대한 어떤 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왕은 이러해야 한다는 구별된 의식이죠. 이는 선대 아버지 사울 왕 때부터 익혀온 습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가 어려서부터 박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테죠. 왕정시대 지도자들은 의복을 중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권위였기 때문이죠.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구별의 상징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금빛 찬란한 의복을 입고 자근자근한 걸음과 절제된 언어로 왕의 품위를 지켰습니다. 그런 예법에 익숙한 미갈은 다윗의 품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어쩌면 속으로, '저 천민 같은..' 이런 욕설을 내뱉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차별적 시선이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이에 다윗이 말합니다. 자신이 춤을 추며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요. 거두절미하고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나도 주님 앞에서 다 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창조물로 똑같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 버려질 사람이 없는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예배는 그런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너도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깨닫는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 체통이 있을까요? 최근 서빙을 하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목사가 이래도 되나?' 

 

그때 주신 생각이 있어요.

 

"저 시골 산골 오지에 부름을 받으면 가서 농사지으며 그들을 섬기지 않을 것인가?"

"저 전쟁터에 부름을 받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공포에 떠는 이들을 위해 사역을 하지 않을 것인가?"

 

사역에 어떤 게 좋고, 어떤 것은 그르고 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르시면 그곳이 좋은 곳이죠. 어디는 맞고 어디는 틀리고 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곳이 가장 좋은 곳이고, 옳은 길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존재니까요. 우리의 체통은 그저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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