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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48 -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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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6~8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였으므로,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꼭 붙들었는데,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주님께서 그렇게 급격히 웃사를 벌하셨으므로, 다윗이 화를 내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베레스 웃사라고 한다. 


오늘은 황망한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사고가 생겼는데요. 이 사고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사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이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궤를 빼앗깁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전리품으로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의 신전으로 가져가는데요. 이때 여러 재앙들이 일어나죠. 하나님의 궤 때문이라고 느낀 블레셋은 그 궤를 본래 있던 벳세메스로 보내죠. 이를 아비나답이 자신의 집에 보관합니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지나죠. 거기서 자란 아비나답의 아들 둘이 운반의 책임을 맡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궤에 대한 지식들을 보고 배웠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니 운반의 책임도 맡은 것이겠죠. 문제는 이때 발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소 달구지에 싣고 옮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잘 가던 소가 갑자기 놀라 날뛰었어요.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질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때 운반자 웃사가 그 위기를 막고자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댑니다. 사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궤는 만지지도 말고, 들여다보지도 말라는 규정이 있었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 위기 상황에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율법이고 뭐고 일단 떨어지는 것은 막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웃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죠.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일처럼 보이는데 또 오히려 벌을 받은 격이니까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자는 규칙을 몰랐다는 것이 이유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규칙이나 규범을 알았던들 눈으로 보이는 그 상황에서 손을 대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손을 대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약궤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 분명하죠. 웃사의 행동은 오히려 언약궤에 대한 책임감의 표현으로 보인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실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갖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나름대로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죠. 그러나 알고도 왜곡하는 것과 선의로 일어나는 잘못은 분명 다르죠.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안의 애정과 책임감이 오히려 잘못된 선택을 만든다는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안에서 주저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곧 나올 다윗의 행동, 그러니까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작업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다른 곳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읽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죠.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언약궤를 만드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보면 언약궤 양쪽 끝에 고리를 만들도록 되어 있어요. 이유는 이 고리에 채를 끼워 사람이 어깨에 매도록 하기 위해서죠. 이는 운반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는 사람이 운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죠. 그런데 오늘 사건은 그 언약궤가 달구지로 운반된다는 것에서 일어났죠. 어쩌면 달구지로 이동하는 편이 수월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빠르고, 더 손쉬울 수도 있죠. 사실 아비나답의 집인 기럇 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수월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어쩌면 작은 차이일지도 몰라요. 순종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때, 보다 조금 세밀하고, 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면, 한 번쯤 더 고민해 본다면, 한 발짝 더 움직이는 적극성을 보인다면 어떨까요?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하죠? 어떤 광고 카피였던 것 같아요. 하루하루의 작은 차이가 내일의 다른 나를 만듭니다. 그 하루에는 알 수 없는, 아니 너무나 쉬운 차이죠. 그런데 그것이 모여서 너무도 어려운, 극복하기 힘든 차이를 만듭니다. 매일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어쩌면 쉽습니다. 하루 10분,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 10분 기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내일은 누구나의 내일이 될 수는 없죠. 그래서 나의 매일매일은 소중합니다. 오늘 작은 차이를 만드세요. 그리고 맡기세요. 나는 오늘의 작은 차이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내일의 명품인 나를 만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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