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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사사기묵상66 - 나는 과정을 거룩하게 걷고, 주님은 결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사사기 21:16~24

병 주고 약 주는 이스라엘 연합의 황당한 결정들이 계속됩니다.
베냐민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이후, 이번에는 베냐민을 걱정합니다.
정말 악어의 눈물이 따로 없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을 위해 아내를 준비시킵니다.
그것도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징계하며 강제로 여자들을 보내죠.
황당한 결정들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을 넘어, 손도 안 대고 코푸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베냐민에는 여인들이 없었던 모양이죠.
이는 아마도 전쟁에서 여인들을 다 죽였기 때문이겠죠.
성읍을 닥치는 대로 전멸시켰다는 구절은 아마도 여인들을 다 죽였다는 말이었던 모양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연약하고 힘없는 여인들을 몰살하는 행위는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너무 무자비한 것 아닌가요?

아직 놀라기에는 이릅니다.
그렇게 여인들을 마련해 주었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여인의 수가 모자란 것이죠.
그래서 또 다른 꼼수를 계획합니다.
그것은 여자들을 납치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축제기간에 여인들이 나와 춤을 추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보아 그 축제가 장막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장막절은 우리로 보면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그런 납치 계획을 세우는 이유가 황당합니다.
베냐민 지파에게 딸을 주면 저주를 받는 맹세를 했기 때문에 못합니다.
그런데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여자를 놓고 마치 물건 흥정하듯 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맹세한 저주를 풀기 위해 계획 납치를 자행하는 것은 더욱 황당합니다.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해내고는 무릎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기막힌 발상이라고 말이죠.
맹세를 지키고, 뜻하는 바도 이루니 말이죠.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네요.
우리 안에도 이런 생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율법의 형식에 얽매여 규정한 것에 한해 행동은 하지만 마음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몸은 나오지만 마음은 없고요.
말씀은 듣지만 마음에 품지는 않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닮은듯하나 마음은 여전히 추하고,
남을 향한 정의에는 엄격하고, 자신을 향한 정의는 언제나 유동적입니다.
그러고도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따른다고 우기죠.
주님을 따르는데 우리의 꼼수는 늘 여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결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과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결과는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어떤 모습이어도 결과는 주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과일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삶은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도 결과는 하나님이실 겁니다.
그 결과는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는 것도 과정뿐이죠.

말장난처럼 보이실 텐데요.
어법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 맹세는 지켰다가 아니라 지키고 있다가 맞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 맹세는 결과가 없을 테니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모여 하나님이라는 결과는 내죠.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3:6,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과정을 이루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아름다운 결과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나의 아름다운 콜라보가 이런 것입니다.
나는 과정을 거룩하게 걷고, 주님은 결과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신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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