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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사기묵상

사사기묵상62 - 나의 감정이 정의는 아닙니다. 사사기20:18~35

기어코 베냐민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전쟁을 시작합니다.
전투는 세 번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 두 번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은 대패를 합니다.
베냐민 지파에는 전투에 능한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급한 이스라엘 연합군은 자시 전열을 가다듬고 마침내 세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합니다.
그렇게 베냐민 자손들은 심판을 받게 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의아스러운 장면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세 번의 전투에 모두 하나님은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전쟁을 지시하시죠.
이스라엘 연합군은 그 응답에 따라 전쟁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패전이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대답이 있었는데도 말이죠.
우리의 모습이 어떻건, 동기가 어떻건,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는 패전이었어요.
그렇다면 앞서 패전한 두 번의 전쟁과 마지막 전쟁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오늘 아침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어요.
22~23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용기를 내어’라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베냐민을 치려고 할 때 그들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명분은 정의이고, 모습은 공정이었으나, 속내는 스스로의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베냐민의 잘못을 치리 하고, 정의를 선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나 유익을 전제로 나섰던 것이 아닌가 싶은 거죠.

우리들도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보면서 그것을 시정하고, 바로잡으려 하죠.
그런 태도에는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죠.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바로 잡아줄 필요도 없고, 충언이나 직언을 할 필요도 없죠.
우리가 누군가에게 지적하고, 충고하는 이유는 ‘사랑’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잃을 때가 많아요.
사랑은 없고 충고만 있는 거죠.
사랑은 없고 지적과 공격만 있어요.
그런 지적, 그런 충고는 그것이 제아무리 맞는 이야기여도 정의는 아닙니다.
정의는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정의는 심판이 아닙니다.
정의의 뿌리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잃은 심판은 저주가 되는 것이죠.

두 번의 전투에서 패했던 이스라엘 연합군은 금식을 하며 주님께 예배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묻죠.
"우리가 또다시 올라가서 우리의 동기 베냐민 자손과 싸워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는 베냐민을 치는 것만이 정의처럼 여겼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혼내주는 것만이 정의라고 여겼던 이스라엘이었죠.
그러나 지금은 모든 주권을 주님께 맡기는 것 같습니다.
금식했다는 것은, 나의 권리,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과한 것일까요?

나의 생각과 뜻에 입각하여 분노를 드러낼 때가 우리는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포장되어서 남에게 쏟아낼 때가 많죠.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어쩌면 그냥 놔두실지도 몰라요.
어쩌면 끓어 넘치는 나만의 정의는 패배를 통해서만 멈추게 되는지도 모르죠.
이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을 묻자 하나님의 응답도 달라지셨습니다.
"올라가거라. 내일은 틀림없이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이전까지는 ‘올라가라’는 말씀만 있었는데요.
이제는 ‘너희 손에 넘겨주시겠다’고 하시네요.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감정이 정의는 아닙니다.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에요.
나의 감정과 느낌에 따라 정의가 세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옳다 여김은, 모든 주권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감정과 느낌 또한 기준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화가 나도, 주님께서 품으신 계획을 넘어서지 못하고요.
내가 아무리 싫어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넘지 못합니다.

오늘도 나의 감정에 의해 살지 마세요.
주님의 사랑에 의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세요.
그것이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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