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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열왕기상묵상

나의 직업, 나의 재능, 나의 일들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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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16-28 나의 직업, 나의 재능, 나의 일들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의 판결]이라는 말을 고유명사화 시킨 유명한 이야기이죠.
그래서 내용에 관해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한번쯤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고 성경에 기록하셨을까요?
솔로몬이 이토록 지혜롭다는 것을 알리려 적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산 솔로몬을 소개하려는 것일까요?
어쩌면 둘 다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성경이 솔로몬을 홍보하는 메시지라는 점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저는 이 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저는 설교시간에
오늘을 살아가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의 삶을 소개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설교를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 훌륭했던 사람이 9시 뉴스에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물론 반갑지 않는 소식으로 말입니다.
보이지는 것과 그 이면의 것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생을 마치지 않은 사람의 삶을 소개하기가
겁이 나기도 합니다.

만약 성경이 솔로몬의 행실을 칭찬하는 방법으로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면 성경 또한 그런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이죠.
또한 솔로몬의 삶이 우리가 본받을만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솔로몬의 삶에 대해서는 차차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 같고요.
문제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의 핵심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보다는
두 여인의 태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교되는 두 여인이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처지이고, 같은 곳에 살며, 같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슬픔도 기쁨도, 행복함이나 어려움이나
다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았다는 것이죠.
어떤 차별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갈라지게 된 원인은 아들 때문입니다.
그 아들이 기쁨의 소산이었는지, 슬픔의 소산이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외부적 조건 때문에
그들의 삶이 갈라졌습니다.

차이는 딱 하나입니다.
아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대한 태도죠.
한 여인은 아들을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의 만족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훨씬 중요하죠.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면 남의 것도 될 수 없는
소유욕이 발동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보는 겁니다.

반면 다른 여인은 자신의 감정이나 만족보다
아들의 안위를 더 걱정합니다.
비록 자신에게 슬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죠.
그녀에게 아들은, 자신을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아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죠.

이 관점으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저는 경제적인 관점을 보는 시각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갈린다고 말씀드렸죠?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인생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려고 창조된 존재들이죠.
그 일을 하기 위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죠.
창조의 목적대로 사명을 따라 사는 삶은 굶기지 않으신다고 말이죠.
그 작은 우선순위의 차이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의 이분법적 접근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세상에는 2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가령 직업이 ‘의사’라고 칩시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의술을 베푸는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해’ 의술을 베푸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으로는 우리가 아는 선함과 악함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의술을 베푸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 진료를 하고, 정성을 다해 의술을 베풉니다.
선하고 착하고 친절합니다.
그런데 다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진료를 하고, 의술을 베푸는 목적이
자신의 명성? 자신의 재능? 자신의 돈? 그것이 목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반면 시각이 ‘남을 위한’ 사람도 있어요.
그는 자신의 기술보다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료를 포기하기도 하고, 약 처방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오히려 메스보다 대화를 더 중요시하고, 냉철함보다 눈물을 앞세우기도 하죠.
어쩌면 무능한 의사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 자신의 재능, 자신의 처지보다 대하는 생명을 더 우선합니다.

오늘 본문의 두 여인과 대비해보면 어떨까요?
과연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입니까?
나의 직업, 나의 재능, 나의 일들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감정’, ‘나의 이익’, ‘나의 만족’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께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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