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2:13-27 우리의 탐욕과 욕망의 끝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데 있습니다.
솔로몬의 즉위로 관심에서 사라졌던 아도니야가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끝내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지는 스토리인지도 모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의 패배자는
끝내 죽음으로 생을 마쳤기 때문이죠.
승리자의 입장에서는 권력투쟁의 불씨를 살려두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권력자에게는 이른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도니야의 숙청은 솔로몬의 권력 강화 차원보다는 아도니야의 욕망이 더 큰 원인처럼 보입니다.
숙청의 발단은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청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청원이 뭐 그리 큰 죄이고, 죽을 일일까요?'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겠죠?
그렇다면 일단 아비삭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미 읽으셨겠지만
아비삭은 다윗의 말년을 함께 보필하던 인물입니다.
물론 동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종의 첩인 셈입니다.
그런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사건은 있습니다.
이전, 그의 형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내몰고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가 도망하고 없는 아버지의 성에서 맨 먼저 한 일은
아버지의 첩들을 백주 대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이제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행동입니다.
이런 형의 행동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또한 솔로몬일지라도 다윗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아비삭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것도 나름의 권력인지라
아도니야가 그 권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죠.
한마디로 재기를 노린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대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간청하는 장면에서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도 아시다시피, 임금 자리는 저의 것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제가 임금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 자리는, 주님의 뜻이 있어서, 이제는 아우의 것이 되었습니다.(15절)"
언뜻 보면 주님의 뜻이
왕은 솔로몬에게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라고요.
여기서 '돌아가'라는 표현은 히브리말로 [싸바브]인데요.
본래 원칙에서 벗어난 변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본래는 왕인데
왕권이 변칙적으로 아우에게 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뭔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뉘앙스죠?
결국 아도니야는 모든 잘못을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열매를
"누가 먹으라 하더냐?"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에 아담은 이렇게 하와를 탓합니다.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창3:12b)
그러나 정작 탓을 하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었습니다.
위의 말 앞에는 이런 단서가 붙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가..."(창3:12a)
우리의 탐욕과 욕망이 무서운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얻고, 가지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탐욕과 욕망의 끝은 결국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과 탓을 돌립니다.
욕심 자체가 죄가 아니라 욕심의 끝이 하나님을 저주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결과의 책임을 우리는 하나님께 돌립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저주의 칼날이 결국 그분께로 향하죠.
우리의 욕망은 결코 순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단순히 취하고 갖는 욕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은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욕망은 사단의 특별한 도구이고,
또한 결코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내가 꿈꾸던 일들이 남의 탓으로, 하나님의 탓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역이 아니라 나의 탐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탐욕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욕망이 아니라 주님의 소망 안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분의 마음에 대해 우리가 더 욕심을 품고, 그분의 뜻에 탐욕을 부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이 땅 사이의 통로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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