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6:12~16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오늘은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축복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주님이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은혜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제자 세움 과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한 사람 한 사람 12명의 제자를 찾아 부르신 것으로 이해하죠.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예수님에게는 많은 무리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그들 중에는 호기심이나 필요에 의해 찾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을 다 제자라고 부르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12명의 제자를 따로 세우신 거죠. 그렇게 세워진 12명의 제자를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니까 12명의 제자를 처음부터 세우신 것이 아니라, 따르는 많은 무리 가운데 골라서 세우셨다는 점이 누가복음서에서 특이한 점이죠.
물론 이 선출 과정이 오늘 본문의 주제는 아닙니다. 선출 방법도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뽑으셨는지, 어떤 기준이 적용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알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뽑으신 12명의 제자의 면면입니다. 그들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주된 사역지가 갈릴리인지라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특히 어부들이 많았죠. 이는 지역적 특성 때문으로 보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생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어부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직업군이었는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다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떤 역사학자는 베드로가 그 지역에서는 꽤나 어부로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누구나 존경하거나 존중받는 주류의 직업군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형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런데 그들의 성격은 형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독불장군과 같았지만, 그의 동생 안드레는 그와 반대로 신중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죠. 야고보와 요한은 조금 다른 의미로 구별이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분이 많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욱한다고 하죠? 어느 면으로 보면 과격한 성격을 가졌던 인물들이죠. 한번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동네를 지날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관계가 좋지 않았죠. 그 때문인지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분을 못 참고 예수님께 불로 마을을 태워 모두를 없애자고 제안하죠. 사마리아인들이 잘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도가 좀 지나치죠. 욕심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왕이 되시면 좌우 한 자리씩 달라고 요구해서 제자들 사이에 큰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 빌립과 바돌로매는 친구 사이였지만 서로 성격은 반대였어요. 빌립은 셈법에 밝았고, 반대로 바돌로매는 순진무구한 사람이었죠. 셈법에 밝다는 것은 칭찬이죠.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약삭빠른 자라는 뜻이고요. 순진무구하다는 말은 반대로 이도 저도 아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로 어땠겠어요? 아시다시피 마태는 유대인이면 모두 싫어하는 세리였고요. 도마는 의심이 많았죠. 의심이 많다는 것은 늘 부정적이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에 늘 ‘안 돼!’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어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요? 지난번에 나눈 말씀처럼, 야고보가 마태의 동생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상처가 많은 인물이었을 거예요. 형이 공부를 잘하는 동생이라면 늘 비교당하는 상처를 경험하게 되죠. 누가 비교하지 않아도 스스로 비교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형이 세리가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등을 지죠.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낯을 들 수가 없어서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르죠. 또 다른 이름의 시몬은 셀롯이라는 별칭을 달고 있죠. 셀롯은 아마도 로마의 지배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민족주의 단체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과격한 무장단체 출신이었다는 거죠. 나머지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입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가리옷 출신의 유다가 그들이죠. 한 명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설명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한 명은 너무도 유명해서 그렇고, 다른 한 명은 너무도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같은 이름인데 정말 다르죠.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특성은 같은 듯 전혀 다른 인물들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은데 같지 않고, 함께 있는 듯한데 전혀 다른 뜻을 지닌 인물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열두 제자의 모습에서 신분이나 학식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 한 공동체에 모였다는 점이 열두 제자의 특징이기 때문이죠. 상극도 그런 상극이 없습니다. 로마의 앞잡이 취급을 받는 세리가 있는가 하면, 무장봉기를 통해서 로마를 부수겠다는 셀롯당원도 있었어요. 셀롯 시몬의 입장에서 마태는 테러의 대상이었습니다. 서로 상극만 있는 것뿐이 아니에요. 성질들도 다양합니다. 베드로처럼 다혈질이 있는가 하면, 요한은 잔인하고 뒤끝이 있는 인물이었어요. 오죽하면 별명이 우레의 자식이겠습니까? 가룟 사람 유다는 예민한 사람이었고, 도마는 늘 구시렁댔어요. 생각해 보면 정말 오합지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두었을까요? 저 같으면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하나같이 성품 좋고 말 잘 듣고 긍정적이고 성실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려 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조건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모르시고 그러셨을까요? 아니면 전부 다 변화시킬 자신이 있으셔서 그러셨을까요?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공생애가 다 끝나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까지도 제자들은 변화되거나 정신을 차린 인물들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 선출에 실패하셨던 것일까요?
저는 이 제자들을 세우시는 과정에서 우리 공동체를 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봐요. 우리는 좋은 사회, 질서 있고 안정된 사회를 꿈꾸죠. 그래서 하나같이 좋은 성품, 좋은 교육, 좋은 인물들이 이루는 사회를 꿈꿔요. 이는 점점 심해져서 마치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인격체를 찍어내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지죠. 얼굴도 다 비슷하고, 지향점도 다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곳으로만 내몰리기 때문이죠. 어디 사회만 그럴까요? 우리는 내 주위에 좋은 사람만 있기를 바라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심지어 아무 일 없는 인생을 꿈꿉니다. 그런데 인생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죠. 정말 다른 이들을 만납니다. 내게 맞는 이도 있지만 진짜 안 맞는 사람도 있죠.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말이죠. 누군가 그랬죠. 아름다움이란 다양하고 다른 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창조할 때 드러나는 신비라고요.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델일지도 몰라요.
저는 이 모습이 교회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죠.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엡 4:28)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엡 4:29)
참 좋은 말들이고 권면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만 되새겨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에게 쓴 편지가 아니라 교회의 교인들,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에게 쓴 편지라는 뜻이죠. 그런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거짓을 버리라고요. 분을 내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라고요.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말이죠. 아직도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왜 바울은 이런 말을 했을까요? 왜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런 권면을 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여전히 거짓말하고 분을 못 참으며, 도둑질하고 더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구절이 사도행전에 나오죠. 사도행전 2장의 말씀입니다.
행2:46~47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전형적인 교인들의 모습이죠. 많은 사람이 이 본문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서로 빵을 떼고, 음식을 나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저는 이들을 보는 이웃들의 반응이 이 구절의 더 큰 핵심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들의 반응이 47절에 나오죠.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고요. 개역 성경에는 칭송을 받았다고 번역되어 있죠.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호감, 혹은 칭송이라고 번역된 이 헬라어 단어가 [카리스]에요. 우리말로는 은혜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 은혜죠. 마땅히 받을 사람이 받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은혜죠. 그렇다면 이 말을 에베소서와 연결해 해석해 보자고요. 사람들은 알았어요. 초대 기독교인들이 저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들 가운데는 전직 도둑도 있었을지 몰라요. 거짓말쟁이라고 알려진 사람도, 늘 화내고, 분내고, 소리 지르고, 자기 성질 못 이기는 사람도 있었고, 입으로는 늘 실수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서로 나눠요.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은혜라고 말하며 칭송했다는 겁니다.
마태를 부르실 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꼬며 말했죠.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이라고 놀렸어요. 그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죠.
눅5:31~32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깨끗한 곳이 아니에요. 점잖고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란 말이죠. 교회는 아프고 연약하고 병들고 쓰러진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입니다. 마치 병원처럼 말이죠. 그들이 치료하고, 회복되고, 나아지고, 성장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자신들의 온전함을 자랑하려고 하죠. 얼마나 깨끗한지, 얼마나 흠이 없는지, 얼마나 멀쩡한지를 자랑하죠. 이는 마치 병원에서 우리 병원에는 환자가 하나도 없어요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은 우스운 일인데도 우리는 그러고 있죠. 조금이라도 병든 자들이 오면 서로 손가락질합니다. 남의 아픔과 상처를 비난해요. 자신도 치료받았으면서 이제 아파서 온 사람들을 보면서 비웃어요.
오래전이죠. ‘교회는 병원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교회가 아프고 병든 이들의 안식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죠. 마치 병원에 와서 나의 아픈 부위를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 의사에게 맡기듯 영적인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말씀과 나눔을 통해 치유하는 그런 교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도 기성의 교회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아무 문제 없는 듯이 자신을 포장하고 감추고, 좋은 모습만 보이려하고, 자신의 치부나 문제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하죠. 교회에서마저 칭찬만 받으려고 해요. 그런데 병원에서 그랬다면 어떨까요? 약을 먹지 않고도 먹었다고 하고,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면 말이죠. 아마도 그 병은 고치기 어렵지 않을까요? 의사의 처방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하라고 제시한 운동이나 식습관을 고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괜찮은 척할까요?
환자여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본래 다 환자예요.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은 우리가 모두 치명적 약점을 가진 환자라는 뜻이죠.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교회에서는 자신이 환자임을 인정하길 저는 바랍니다. 그래야 치유가 시작되고 성장이 이루어지니까요. 그러라고 교회가 있는 거니까요. 교회에서 뭔가 일을 잘하는 것은 칭찬의 조건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환자에 병원 일을 돕는다고 칭찬받겠습니까? 오히려 주제넘다고 면박 당하지 않을까요? 병원에서 칭찬받을 일은 자신의 아픔을 다 고하고, 정확히 자기 몸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겠죠. 또한 함께 치료의 과정을 공유하며 노력해 나가는 것일 거예요.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습니다. 무슨 헌금이나 사역,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이죠.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의 영이 치유되고, 나의 병이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모든 가식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하죠. 자신의 약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야 해요.
병원에서 누가 아프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교회에서도 아픈 것을 놓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실수를 많이 하죠. 그것이 그의 아픔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감정을 긁고 싶겠어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 주는 것을 즐기는 것은 사이코패스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도 상처를 주죠. 주고 싶지 않은데 주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병이죠. 사회에서는 그 병이 비난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감추죠.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 병을 드러내야 합니다. 치유되어야 하니까요. 모든 사람이 성질 다 부리죠. 그것이 그의 상처요 병임을 안다면 우리는 보듬어주고 감싸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만큼은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손가락질받을 일일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인정받고 덮어주며 위로와 격려해 줄 일이 되니까요. 그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자신의 못난 자아를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자랑했으면 좋겠어요. 감추고 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에 끊임없이 기도 제목이 이어지죠. 누군가 아파서, 문제가 생겨서, 어려워서, 시험을 당해서,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서 기도가 계속되어요.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기도가 대부분 응답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에요. 참 감사하고 신기해요.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시면 좋은 결과들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경험하잖아요? 그렇게 많은 문제를 서로가 알고, 서로가 감싸며 기도할 때 귀한 역사가 일어나고 치유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축복이에요. 나와 같은 사람, 나와 통하고 비슷한 사람만 모이지 않아서 감사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딪힘이 있는 공동체이기를 바래요. 그 속에서 나의 연약한 문제와 알지 못했던 숨겨진 병들이 조기에 드러나고 또 치유할 기회가 주어짐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요.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어요. 다 고침받아야 할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들이 서로 함께 서로 격려하며 내 안에 있는 병들을 치유해가는 그런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귀한 공동체였으면 좋겠어요. 예수님께서 우리게 오신 이유, 우리가 죄인임을, 환자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픈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상처받고 왜곡된 내 자아는 잘못이 없어요. 우리는 본래 그런 존재입니다.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못난 존재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게 오셨고요. 그런 연약한 존재가 서로 보듬으며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환자가 병을 감추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감춰서 해결되지 않아요. 뒤로 숨는 것이 최악이고 죄입니다. 사랑은 남의 연약함을 덮어주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와 용납, 고백과 연합을 통해 우리의 영이 고쳐져요. 그래서 교회는 더러워서 아름답고, 문제 많아서 은혜롭고, 부족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 그런 교회 만들면 좋겠어요. 쇼위도우 같은 교회가 아니라 부족함을 알고도, 모자람을 알고도, 삐뚤어진 존재임을 알고도 주님의 가르침을 멈추지 않는 병원 같은 교회 되기를 기도해요. 그렇게 고침받는 우리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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