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23 - 우리의 모든 행동양식은 사랑입니다.

반응형

누가복음 6:8~11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휴일을 마치고 나니 벌써 금요일이네요.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퐁당퐁당 휴일이 있다 보니 피곤하다고요.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혹시 여러분도 그런 마음이신가요? 일하다 쉬다 하다 보니 발란스가 깨져서 힘드신가요? 그래서 쉼 없이 쭉 일하시면 좋을까요? 아니면 이 참에 쭉 쉬는 게 좋으시겠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휴일은 휴일로 족하고 일은 일로 족한 것입니다. 다 감사한 것들이죠. 그 감사를 잃으면 피곤한 겁니다. 작은 선물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이 큰 선물을 받습니다. 작은 은혜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위에 큰 축복이 임하는 법이죠. 어제의 휴일에 감사하고 또 오늘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내일은 이제 주말이어서 감사하고요. 모레는 사랑하는 공동체 가족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또 감사하는 우리 되길 빕니다.

 

예수님은 눈치가 빠르셨던 것 같아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의 속마음이 어떤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그들이 예수님을 쫓으며 했던 행동양식이 똑같았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을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불러 세우셨죠. 그리고 보란 듯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물어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이실까요? 아마도 제가 아는 여러분들은 모두 다 한결같은 대답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착한 일이고, 목숨을 살리는 일이겠죠. 무엇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지 않는 분들이시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모든 사람이 다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이 말에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일지라도 말이죠. 마치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부정한 시체로 여기며 거들 떠 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지나치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옳은 일이고, 그것이 자기 목숨을 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규례에 대해 그들처럼 목을 매지는 않죠.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보다 나을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나만의 율법과 규례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의 율법을 고대 유대교 전통의 율법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경험, 자신만의 지식, 더 나아가 자신만의 신념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배운 것이 절대적이고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라는 아집은 어쩌면 유대인들의 율법보다 더 견고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독교는 아집의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포용의 종교죠. 포용이라 함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하는 능력입니다. 오직 창조주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나 어떤 이념과 사상도, 어떤 종류의 사람까지 모두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비록 지금 엇나가고 진리를 모른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갈리고 깨어지며 새로운 피조물로 성화되어 간다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차별하거나 혹은 저주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차별이나 배척은 다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 있죠. 그들은 성질이 불같아서 화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많아서 화를 많이 내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까 봐, 내가 믿는 것이 흔들릴까 봐,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훼손될까 봐, 혹은 내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려워서 화를 내는 겁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불리는 이유는 말랑말랑해서가 아니라 그런 두려움이 없는 포용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고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그래서 어떤 것도 훼방하지 못할 유일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죠.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법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뿐이에요. 진정한 사랑이라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고, 진실된 사랑이라면 어떤 유혹에도 참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의 모든 행동양식은 사랑이길 기도합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