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묵상일기 79 - 피할 수 없다면 즐기세요.

2023. 12. 19. 06:50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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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15:13~1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유다 자손의 분깃 가운데서, 아르바에 가지고 있던 성읍 헤브론을 주었는데, 아르바라는 사람은 아낙 사람의 조상이다. 갈렙은 거기에서 아낙의 세 아들 곧 아낙이 낳은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드빌 주민을 치러 올라갔다. 드빌은 일찍이 기럇세벨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때에 갈렙이, 기럇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사람은 그의 딸 악사와 결혼시키겠다고 말하였다. 갈렙의 형제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곳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은 그를 자기의 딸 악사와 결혼시켰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악사는 자기의 남편 옷니엘에게 아버지에게서 밭을 얻어내라고 재촉하였다. 악사가 나귀에서 내리자, 갈렙이 딸에게 물었다. "뭐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 악사가 대답하였다. "저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 메마른 땅을 주셨으니, 샘 몇 개만이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온이 많이 찹니다. 특별히 건강관리 잘하시고요. 전보다 미리미리 스트레칭 등 몸을 움직여 풀어주시기 바래요. 아무리 추위가 강한 들 준비된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험지로 보내달라고 간청한 갈렙의 호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 헤브론과 드빌을 점령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죠. 헤브론과 드빌은 모두 이스라엘 남부지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여호수아서를 묵상하며 잘 따라오신 분들은 의아한 부분이 있으실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은 가나안 남부지역 전쟁에서 헤브론과 드빌을 점령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헤브론과 드빌을 다시 점령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왜 그럴까요? 남부지역 점령전쟁 당시 헤브론 정복은 가나안 남부 전쟁의 핵심적인 전과였는데요. 그런 헤브론이 지금은 심지어 아낙의 세 아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기록이 의아함을 증폭시키죠.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습니다만 유추컨대 아마도 이스라엘이 남부 점령을 이룬 후에 이제 북부지역 전쟁을 하는 동안 전쟁에서 패했던 여러 지방의 아낙 자손들이 다시 규합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낙의 세 아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각기 다른 도시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패한 후 세를 모아서 모였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이죠. 그들이 모인 곳이 헤브론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 본문은 갈렙이 이 두 지역을 점령함에 있어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정신없고 바쁜 전쟁 중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니만큼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할지도 모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갈렙은 드빌을 정복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주기로 하죠. 오늘날 아무리 자식이어도 아버지가 마음대로 결혼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회적 제도들이 만연했음을 이해해야 하겠죠. 이에 옷니엘이 등장합니다. 옷니엘은 가나안 정복 전쟁시기와 가나안에서 정착하며 혼돈의 시기였던 사사시대를 아우르는 인물입니다. 그가 사사시대 첫 사사로 등장했던 인물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그는 젊어서부터 용맹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옷니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아내인 악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죠. 갈렙의 딸 악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여성이나 어린아이들이 다 그랬듯이 사회적 결정에 강제적으로 따라야 했던 구조였죠. 그래서 그녀는 남편도, 그리고 살 집도 자신이 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정해진대로 살아야 했던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악사를 보면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남편인 옷니엘에게 아버지 갈렙으로부터 밭을 얻도록 재촉하죠. 악사는 자신이 살 지역을 정할 수는 없지만 이왕 살 곳이라면 원하는 땅을 얻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죠. 게다가 남편에게만 떠넘기지 않고 자신도 직접 나서죠.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마도 매우 슬픈 표정으로 연기를 했던 것으로 보여요. 그러니 아버지 갈렙의 입에서 "뭐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는 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겠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악사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메마른 땅을 주셨으니, 샘 몇 개만이라도 주시기 바란다고 하죠. 이 말은, '메마른 땅에서 사는 것은 피할 수 없으니 순종하겠습니다. 다만 우물을 나에게 주세요.'라는 뜻이죠.

 

저는 이 에피소드가 왜 여기에 등장했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갈렙의 스토리와 연관 지어서 이 본문을 묵상했어요. 갈렙도 그랬죠. 자신이 험지로 가야 할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악사도 마찬가지죠. 때론 우리의 인생도 그렇죠. 정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꾸고 싶고, 환경을 바꾸고자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이 우리 앞에 놓이죠. 그때마다 우리는 절망합니다. 내가 원치 않던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죠.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정한 일, 내가 선택한 일들이 아닌 경우들을 맞닥트릴 때죠. 마치 운명이 결정된 것처럼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볼 때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악사는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 아닌, 누군가에 의한, 누군가로 인해 정해진 일들을 불평하지 않아요.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죠. 대신 그녀는 그 숙명 앞에서 복을 구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악사가 아버지 갈렙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부탁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어는 [베라카]인데요. 이 말의 본래 뜻은 '복'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복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상황을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복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 에피소드가 저에게는 신앙의 근본을 알려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는 상황을 바꿔달라고 말하죠. 그래서 불평이 나오는 거죠.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내 그것이 우리의 길이 아님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구할 것은 상황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이길 복을 구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은혜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나요? 우리의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다만 은혜를 구하고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는 지혜가 바로 우리의 믿음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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