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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81 - 무엇이든 문제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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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17:8~13   답부아 주변의 땅은 므낫세의 소유이나, 경계선에 있는 답부아 성읍은 에브라임 자손의 소유이다. 또 그 경계선은 가나 개울로 내려간다. 그 개울 남쪽으로 성읍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므낫세의 지역 가운데 있지만, 에브라임에 딸린 것이다. 므낫세의 경계선은 그 개울의 북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중해에 이르러 끝난다. 그 남쪽은 에브라임의 소유이고, 북쪽은 므낫세의 소유인데, 지중해가 그들의 서쪽 경계이다. 그 땅이 북서쪽으로는 아셀에 맞닿고, 북동쪽으로는 잇사갈에 맞닿았다. 벳산과 그 변두리 마을, 이블르암과 그 변두리 마을, 해안에 있는 도르의 주민과 그 변두리 마을, 엔돌의 주민과 그 변두리 마을, 다아낙 주민과 그 변두리 마을, 므깃도의 주민과 그 변두리 마을은(셋째는 나벳인데), 잇사갈과 아셀의 지역 안에 있는 므낫세의 소유이다. 므낫세 자손이 이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해진 다음에 가나안 사람에게 노동을 시켰으나, 그들을 다 쫓아내지는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내린 눈으로 길이 좋지 않습니다. 찬바람도 많이 부네요. 특별히 목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목도리도 잘 챙겨서 나가시길 바래요. 오늘도 건강하게 밝고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요셉 지파의 분배 이야기가 조금 길게 이어지죠. 길이와 상관없이 뭔가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면 성경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죠. 어제는 요셉 지파의 딸들에 대한 묵상을 했죠. 그녀들의 용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면도 있음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죠. 때론 용기는 담대함이 될 수도 있고, 무모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론 믿음의 소산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교만의 표현이 되기도 하죠. 심지어 믿음의 담대함으로 용기를 내었다가 기고만장의 교만으로 끝맺음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죠.

 

어제 슬로브핫의 딸들의 용기가 교만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용기에서 나온 것인지 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슬로브핫 딸들의 용기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도전하는 좋은 예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일단 본문은 요셉 지파의 땅에 대한 경계를 그리고 있죠. 조금 간편하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거의 갈릴리 호수 근처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요단강에서 서쪽 지중해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 바로 요셉 지파, 그러니까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뭔가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으셨나요? 보통 성경에서 뭔가를 이야기할 때 보면 반복된 말들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죠. 오늘도 지속적인 반복이 있죠. '변두리'라는 말인데요. 오늘 본문에서 '~지역 주민과 그 변두리마을'이라는 말이 계속되죠. 변두리 마을이라는 표현을 왜 이리 지속적으로 반복했을까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 등장하는 지역들, 그러니까 벳산, 이블르암, 도르와 엔돌, 다아낙, 그리고 므깃도 등의 지역들은 매우 중요한 지역들이라는 점이 눈에 뜨이죠. 특별히 이 지역들은 가나안의 동과 서를 잇는 중요 교통로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리고 그들 지역에 변두리 마을이라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어요. 여기까지는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그다음 구절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 18:12   므낫세 자손이 이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으로 이 구절이 다가오시나요? '변두리'라는 말은 그 지역 주변의 마을을 뜻하는 말이죠. 물론 이런 표현을 구약에서는 종종 사용합니다. 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를 다 아우르는 표현이죠. 그런데 저는 이 표현이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과 연결 지어서 들렸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완전하고 깨끗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아간처럼,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지역들을 점령했다는 거죠. 왜 그랬을까요? 분명 가나안을 점령하라는 명령은 여전히 살아있는데도 말이죠. 

 

저는 이 부분에서 요셉지파의 안일함과 교만함을 보게 되는데요. 특권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있죠. 대충 넘어가고, 좋은 게 좋은 것이 되죠. 그들의 정의는 늘 선택적이고 자신에게 이로운 부분에서만 철저하죠. 이쯤 하면 괜찮겠지가 만연합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하냐면 이 요셉지파,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들은 가나안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동서로 가장 큰 땅을 차지했죠. 그들은 후에 다른 10개 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만들어 분열을 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722년경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죠.

 

무엇이든 문제는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이것쯤이야!' 했던 일이 자신들을 삼켜버릴 줄은 아마 그때는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쯤은 괜찮겠지~' '뭐 한 번 빠진다고 뭔 일이 있겠어?' '다 이유가 있는데 다 이해하실 거야~' 갖가지 이유가 다 있지만 결국은 다 똑같습니다.

 

'이것쯤이야 괜찮겠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 작은 일은 조만간 내가 감당키 어려운 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갑자기 큰일이 터지는 법은 없어요. 언제나 나의 작은 문제 하나로, 그때는 내가 할 수 있고 주무를 수 있고, 컨트롤할 수 있었던 그 단순한 일이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커져서 어떤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게 되죠. 그래서 믿음은 내가 할 수 있을 때 가져야 합니다. 만날만 할 때에 주님을 불러야 하고요. 일어설 힘이 있을 때 용기내야 하죠. 오늘 나의 생각이 10년 후 나를 죽고 살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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