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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31 -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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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3:18~39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는, 삼십 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였다. 바로 그가 창을 휘둘러서, 삼백 명을 쳐 죽인 용사이다. 그는 세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그는 삼십 인 특별부대 안에서 가장 뛰어난 용사였다. 그는 삼십 인 특별부대의 우두머리가 되기는 하였으나,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여호야다의 아들인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으로, 공적을 많이 세운 용사였다. 바로 그가 사자처럼 기운이 센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 죽였고, 또 눈이 내리는 어느 날, 구덩이에 내려가서, 거기에 빠진 사자를 때려죽였다. 그는 또 이집트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그 이집트 사람은 풍채가 당당하였다. 그 이집트 사람은 창을 들고 있었으나, 브나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그에게 덤벼들어서, 오히려 그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세 용사와 함께 유명해졌다. 그는 삼십 인 특별부대 안에서 뛰어난 장수로 인정을 받았으나,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그를 자기의 경호대장으로 삼았다. 삼십 인 특별부대에 들어 있는 다른 용사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더 있다.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하롯 사람 삼마와, 하롯 사람 엘리가와,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으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들과, 요나단과,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마아가 사람의 손자로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소바 사람으로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헷 사람 우리야까지, 모두 합하여 서른일곱 명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다윗은 미우나 고우나, 좋으나 나쁘나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합니다. 사실 이렇게 이름이 나열되면 읽는 우리들은 좀 난감하죠. 익숙한 이름들도 아니고 읽기도 힘듭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죠. 마음먹고 성경을 일독하려고 마태복음을 시작했는데 거기 나오는 족보에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죠. 일단 이런 이름들을 대하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요.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데 적어 놓아 시간을 빼앗는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어떠신가요? 오늘 본문을 다 읽으셨나요? 이름들을 하나씩 다 읽어보셨어요? 어쩌면 많은 분들이 이름은 그냥 넘어가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어서 이 나라를 잘 알죠. 그런데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을 잘 모릅니다. 보통은 이렇게 묻습니다. 일본 사람인가? 중국사람인가? 그리고는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류가 어떻다, 세계적인 위상이 어떻다 하지만 그래도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 어떤 나라인지 아는 사람은 흔치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 무식하다고요? 천만에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계 지리에 관심이 무척 많은데요.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세계 나라와 수도를 거의 외울 정도였죠. 물론 지금은 다 잊었고, 또 바뀐 나라 이름과 수도도 많아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잠시 미국에 머물 때 시에라리온 사람을 만났습니다. 저는 시에라리온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몰랐어요. 그저 아프리카 사람이라고만 알았죠. 그가 자신의 나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그래도 저는 그저 아프리카 사람이라고만 이해했습니다. 동양의 작은 한국을 세계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것도 모르냐?라는 반문은 우리나 하는 것이지 다른 문화에 있는 이들은 한국을 아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죠. 우리가 아프리카, 혹은 동유럽, 남미의 나라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껏 한국전쟁 정도로 기억하는 것도 많이 아는 편에 속하죠.

 

그런데 그런 한국을 알아주고 한국문화를 알아주면 얼마나 뿌듯합니까? BTS가 빌보드 차트에서 연속 1위를 달리고,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들을 휩쓸며 우리를 기억하는 세계인들이 많아지는 것에 어깨가 으쓱해질 때가 있죠. 그만큼 자기의 이름이 기억된다는 것은 너무도 신기하고 기쁜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과 같은 일이죠. 게다가 기억되고 기념된다면 그보다 더 귀중할 때가 어디 있겠어요? 저 또한 성경에 이름들이 등장하면 잘 안 읽었습니다. 일단 발음이 잘 안 되더라고요. 이름도 좀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하는 순간, 한국 이름들을 발음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저런 발음도 못하냐? 싶겠지만 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죠. 그럼에도 모든 이들에게 기억되고 불리는 이름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의 이름들을 또박또박 읽어봤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는지, 어떤 모양과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찬받을 인물임을 믿으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어요. 다윗처럼 왕이 아니어도, 무슨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도, 찬란한 업적과 일생이 아니어도, 그저 자신의 일만 했을 뿐인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신다는 말씀이 이 이름들을 읽는 와중에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맨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있었습니다. 우리야! 참 처연한 이름입니다. 다윗의 입에서 이 이름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흑역사조차 가리지 않는 모습이 진정한 회개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런데 그런 다윗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야를 생각하기보다 그 우리야 자체의 인생에서 바라보면 더욱 아련합니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입니다. 의롭고 강직해서 빨리 죽은 인물이죠. 갖기보다는 빼앗긴 인물이고, 누리기보다는 당하기만 한 인물입니다. 왜 느끼지 못했겠습니까? 다윗의 황당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왜 느낌이 없었겠어요? 자신이 최전선에 가야 하는 상황이 자연스럽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죠. 그래서 허무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여기에 적혀 있어요. 주님의 손바닥에 새긴 이름처럼 말이죠.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기억해... 아무리 작은 너여도 나에게는 크고 귀중한 자녀니까..."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라도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이에요. 그가 아들의 핏값으로 산 존재입니다. 매일 아침 그분의 입에 올려진 이름이고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분은 알아주시고요. 아무도 나의 마음을 몰라줘도 그분은 내 마음을 아셔요. 그러니 억울해하지 마세요.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세요. 이 아침에도 주님은 내 이름을 부르시며 새날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허락 없이 주어지는 시간은 없어요. 나는 그런 존재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새겨진 존재, 그분의 입에 언제나 불리는 존재, 손바닥에 새긴 이름입니다. 

 

오늘도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시는 주님을 느끼며 하루를 자신 있게 살아가는 우리이길 빕니다. 영적 자존감으로 충만한 오늘이길 빌고, 그 자존감이 나를 빛나게 하는 하루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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