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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26 - 감사한 일만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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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2:1~20   주님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셨을 때에, 다윗이 이 노래로 주님께 아뢰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구해 주십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셨습니다. 죽음의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파멸의 파도가 나를 덮쳤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동여 묶고, 죽음의 덫이 나를 낚았다. 내가 고통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고,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의 성전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 주님께 부르짖은 나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귀에 다다랐다. 주님께서 크게 노하시니, 땅이 꿈틀거리고, 흔들리며, 하늘을 받친 산의 뿌리가 떨면서 뒤틀렸다. 그의 코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그의 입에서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을 뿜어 내시니, 그에게서 숯덩이들이 불꽃을 튕기면서 달아올랐다.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실 때에, 그 발아래에는 짙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주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아오셨다. 바람 날개를 타고 오셨다. 어둠으로 그 주위를 둘러서 장막을 만드시고, 빗방울 머금은 먹구름과 짙은 구름으로 둘러서 장막을 만드셨다. 주님 앞에서는 광채가 빛나고, 그 빛난 광채 속에서 이글거리는 숯덩이들이 쏟아졌다.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천둥소리를 내시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목소리를 높이셨다. 주님께서 화살을 쏘아서 원수들을 흩으시고, 번개를 번쩍이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다. 주님께서 꾸짖으실 때에, 바다의 밑바닥이 모조리 드러나고,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콧김을 내뿜으실 때에, 땅의 기초도 모두 드러났다.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나를 움켜 잡아 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주님께서 원수들에게서, 나보다 더 강한 원수들에게서, 나를 살려 주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살려 주셨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원수들이 나에게 덤벼들었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내가 의지할 분이 되어 주셨다. 이렇게, 나를 좋아하시는 분이시기에, 나를 넓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나를 살려 주셨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편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18편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죠. 시는 시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른 의도나 배경, 신학적 해석들을 벗고 그저 시적인 표현으로 음미하며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시로서 이 본문을 읽은 느낌이 어떠신가요? 다윗이 많은 것에 재능을 가진 왕이지만 사실 제일 잘하는 것은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던 용맹보다, 분란과 반란을 잠재우는 능력보다 그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제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왜 이 본문이 등장했을까 싶었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대하면서 그 말씀을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 이 말씀을 주셨을까를 생각해 봐야죠.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간 읽은 사무엘서의 말씀이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일단 반란들을 다 잠재우고 다윗성으로 귀환한 이후 말씀은 갑자기 다른 사건으로 시선을 옮기죠. 흉년이 든 사건이었습니다. 21장이었죠. 그리고 거인족들을 물리친 일들과 오늘 시편,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데요. 이 이야기들은 시간 배열이 좀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껏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진행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사건을 불러왔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죠. 오늘 본문도 언제 쓴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1절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윗이 사울 왕의 위협에서 해방되었을 때였던 것으로 보여요. 그러고 보니 21장과 22장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는 듯 보이죠? 다윗이 왕위에 오른 어느 시기에 흉년이 났을 때의 일과 골리앗을 무찌른 이후 다윗 앞에 생긴 용맹스러운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사울에게서 해방되는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일까요? 이제 사무엘서가 정리되는 마무리 단계에 왜 이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할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다윗이 가장 잘하는 일들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죠.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잘하는 일들을 그의 인생 마지막에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정리해 봤습니다. 어떤 일을 다윗이 가장 잘했을까? 하고요. 

 

흉년이 들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그 해답을 찾죠. 어쩌면 다윗이 가장 잘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해답을 하나님께 묻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그의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께 물어 실행되었죠. 광야의 목동으로 있을 때에도 그는 늘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그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그분의 마음은 어디에 계신지를 묻고 대답하는 일이 그의 일과였죠. 그 속에서 그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그에게 영적인 자존감을 가져다주었죠. 그 자존감이 살아 있을 때 그는 많은 주위의 부러움과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 영적인 자존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그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감사하는 태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은 감사로 치장되어 있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돌보심에 대한 감사의 감정이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감사가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감사만 존재할 수 있는 삶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유모를 억울함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들이면서 소외되는 삶을 살아야 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받은 기름부음인데, 그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도망자 신세로 세월을 보내야 했고,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야 했죠. 이런 삶이 어찌 감사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저라면 속상함과 분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시가 절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아픔과 절망적인 감정을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의 시에는 그런 넋두리가 없어요. 다만 그에게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장 잘하는 것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리고 그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말씀의 의도는 우리 또한 이것을 잘해야 한다는 말씀 아닐까요? 주님을 묵상하고, 영적 자존감을 세우며, 감사로 내 삶을 정리하는 일 말이죠. 

 

감사한 일만 기억하세요. 우리의 삶에는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존재하죠. 그러나 지나간 아픔과 슬픔은 잊으세요. 오직 감사와 기쁨만 남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새로운 길을 온전히 걷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상처와 아픔, 슬픔과 분노는 우리의 새로운 길을 왜곡시키는 촉매제가 되기 때문이죠. 이를 가는 일은 오로지 복수만 꿈꿀 뿐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내 부정적인 감정도, 슬픔도, 상처도 다 지나갔습니다. 오직 감사만 남겨야 합니다. 그 감사로 내 안에 주님만 남겨야 해요. 그것이 내 자존감이 되고, 그것이 내 능력이 되어서 다른 이들의 도움과 역사, 심지어 시간의 흐름까지도 새롭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여러분이 잘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분노입니까? 절망입니까? 슬픔입니까? 저는 이제 내가 잘하는 것을 바꾸려 합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수많은 감정 중에 감사와 기쁨만 남길 줄 아는 것으로 말이죠. 수많은 말 중에 하나님의 약속만 기억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프고 힘든 인생 가운데 기적과 같은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들만 기억하는 제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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