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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28 - 자존감은 복을 부르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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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2:29~51   아,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나의 등불이십니다. 주님은 어둠을 밝히십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신실하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 주님밖에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의 하나님밖에 그 어느 누가 구원의 반석인가? 하나님께서 나의 견고한 요새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걷는 길을 안전하게 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튼튼하게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 주신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투 훈련을 시키시니, 나의 팔이 놋쇠로 된 강한 활을 당긴다. 주님, 주님께서 구원의 방패로 나를 막아 주시며, 주님께서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나의 담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내가 발걸음을 당당하게 내딛도록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발목이 떨려서 잘못 디디는 일이 없게 하셨습니다. 나는 원수들을 뒤쫓아가서 다 죽였으며, 그들을 전멸시키기까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의 발아래에 쓰러져서 아주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들을 내가 무찔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싸우러 나갈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나를 치려고 일어선 자들을 나의 발아래에서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원수들을 내 앞에서 도망가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진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고, 주님께 부르짖었지만 끝내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산산이 부수어서, 땅의 먼지처럼 날려 보내고, 길바닥의 진흙처럼 짓밟아서 흩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반역하는 백성에게서 나를 구하여 주시고, 나를 지켜 주셔서 뭇 민족을 다스리게 하시니, 내가 모르는 백성들까지 나를 섬깁니다. 이방 사람이 나에게 와서 굽실거리고, 나에 대한 소문만 듣고서도 모두가 나에게 복종합니다. 이방 사람이 사기를 잃고, 그들의 요새에서 떨면서 나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신다. 나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의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여라.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 뭇 백성을 나의 발아래에 굴복시켜 주셨습니다. 원수들에게서 나를 구하여 주셨습니다.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보다 나를 더욱 높이셔서, 포악한 자들에게서도 나를 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뭇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손수 세우신 왕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손수 기름을 부어 세우신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영원무궁하도록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도 다윗의 찬양 시로 채워집니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일과 이에 대한 감사로 가득하죠. 믿음은 기억과 기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주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일들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34절의 말씀인데요.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튼튼하게 만드셨다는 대목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액면 그대로 읽으면 운동을 해서 발이 튼튼해졌다는 의미겠죠? 더 심오한 이해는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강건해졌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두 발이 튼튼해졌을까요? 매일 아침마다 산에 오른 것일까요? 줄넘기나 스쿼드 같은 것을 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산을 즐기고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 것일까요? 물론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관리에 충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관찰한 다윗은 그런 이유보다 다른 이유로 산에 오른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것은 사울에게 쫓겨서죠. 그는 도망을 다니느라고 산을 올랐습니다. 화살과 창을 피해 달렸고, 숨을 곳을 찾아 산을 헤맸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산에 오르며 곳곳을 뛰어다닌 이유는 바로 이 이유였을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발을 튼튼하게 해 주신 은혜로 기억합니다.

 

만일 우리가 도망자가 되고 누군가에 쫓기며 산을 헤매 다녔다면 그 고생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상황이 늘 나로 하여금 쉬지도 못하는 도망자 신세로 내몰았다면 우리는 나의 처지, 나의 상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요? 

 

35절에는 또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삼하 22:35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투 훈련을 시키시니, 나의 팔이 놋쇠로 된 강한 활을 당긴다.

 

그가 전투에 나갔던 것은 떠밀려서입니다. 심지어 채 어른이 되기도 전인 소년일 때 그는 전쟁에 참여했어요. 다른 어른들이 차마 용기조차 내지 못할 때 다윗이 그 부담을 짊어지고 총받이로 나갔던 거죠. 그 이후, 그는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두 다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자신에게 주신 훈련으로 기억합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강한 활을 당길 힘을 얻었다고 말이죠. 우리에게 위태로운 위기가 찾아오고, 앞 모를 두려움이 엄습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아픔과 공포가 내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하게 될까요?

 

그리고 그 기억의 결론으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죠. 36절입니다.삼하 22:36   주님, 주님께서 구원의 방패로 나를 막아 주시며, 주님께서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나의 담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거듭된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피할 길을 내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그는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 담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용기일 수도, 낙관일 수도, 담대함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자존감'이라고요. 이미 함께 나누었던 말씀이기도 하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 그 사랑이 나에게 능력이 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세워지는 '자존감'이죠.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은 다름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자존감'이죠. 

 

어쩌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모두 나의 자존감을 돈독케 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이며, 주님께서 대신 죽기까지 기회를 주시고 살리고 싶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인지도 몰라요. 때론 아프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느끼길 원하시고, 때론 어려움 중에도 기어이 돌파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닫길 원하시죠. 그렇게 나는 특별한 사람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침에 이런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네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를 거예요. 그분의 돌보심과 함께하심이 여전하실 겁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감사할 것이고, 그 감사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으로 하루를 채우게 될 겁니다. 또한 그 자존감은 능력이 되어서 빛으로 퍼질 거예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고, 돕는 손길을 이끌 것이고, 복을 부를 것입니다. 그런 선순환이 나의 삶에 이루어져야 하죠. 그러기 위해 오늘도 감사한 일들을 기억하시고,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기대하세요.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다 따라옵니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들은 끌려와요. 자존감은 복을 부르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오늘도 경험하는 우리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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