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1:7~14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들 사이에 계시는 주님 앞에서 맹세한 일을 생각하여,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아껴서 빼놓았다. 그 대신에 왕은 아야의 딸 리스바가 사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인 알모니와 므비보셋을 붙잡고, 또 사울의 딸 메랍이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인 아드리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다섯을 붙잡아다가,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겨주었다. 기브온 사람이 주님 앞에서 그들을 산에 있는 나무에 매달아 놓으니, 그 일곱이 다 함께 죽었다. 그들이 처형을 받은 것은 곡식을 거두기 시작할 무렵, 곧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에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쳐 놓고, 그 밑에 앉아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하늘에서 그 주검 위로 가을비가 쏟아질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야의 딸이며 사울의 첩인 리스바가 이렇게 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전해지니, 다윗이 길르앗의 야베스로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그 주민에게서 찾아왔다. (블레셋 사람이 길보아 산에서 사울을 죽일 때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벳산의 광장에 매달아 두었는데, 거기에서 그 시신을 몰래 거두어 간 이들이 바로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이다.) 다윗이 이렇게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거기에서 가지고 올라오니,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다른 사람들의 뼈도 모아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인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런 본문 앞에 설 때가 가장 난감합니다. 사람의 목숨으로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다니요. 게다가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어야 하는데 누구를 보냅니까? 그것을 정하는 것도 죽을 맛이겠죠. 마치 이것은 무슨 산 제물과도 같은 일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아껴 빼놓았다는 부분에서는 누군가 덜 아낀 사람이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여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실 똑같은 생명인데 아깝지 않은 생명이 어딨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인간이 어딨고, 다른 이보다 귀한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은 다 귀한 것이죠. 신분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인종이나 성별, 친소관계와 상관없이 생명은 모두 귀하죠. 아니나 다를까 선택된 일곱 명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집니다. 두 아들을 읽은 엄마, 리스바는 아들의 주검을 매장하지도 않은 채 그 주검 곁에서 보리 거두기 시작할 때부터 가을비가 쏟아질 때까지 굶은 베옷을 입고 지켰다는 것이죠.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기간을 계산하는 것도 무의미하죠. 다만 보통 보리를 봄에 거두니 가을비가 내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기간이었겠죠. 더욱이 나무에 달린 시신은 새들이나 짐승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막기 위해 편하게 자지도 못하고 무서운 짐승과 대적하며 버텨야 했을 것입니다. 처절한 슬픔이 베어 나오는 장면이죠.
복수를 복수로 해결하는 방식은 처참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이죠. 피의 복수는 끝이 없습니다. 해결은 복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복수의 칼을 접고 용서와 이해의 꽃을 피워야 끝이 나죠. 모든 심판이 그렇습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갚아야 하고 똑같이 당해야 하는 억울함의 호소로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을 마지막 대가로 내놓으시고 자신을 끝으로 용서와 사랑의 꽃을 피우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죠.
다윗도 참 힘들고 어려웠을 거예요. 왕의 자리는 고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고, 또 그렇다고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면서까지 왕의 권위를 지켜는 것 또한 모순이죠. 본문에는 숨겨져 있지만 다윗의 결정에는 아픈 고뇌들이 묻어납니다. 그 예로 리스바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합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이었죠. 그녀 개인적으로 보면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은 비운의 여인인 셈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서 잃은 사울의 주검과 아들의 주검을 수습하여서 사울 가문의 무덤에 고이 안장을 하죠. 물론 이것으로 죽은 생명이 살아 돌아오지는 못합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보상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은 맞습니다.
우리는 본의 아닌 아픔들을 많이 당합니다.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죠. 이 일로 억울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복수심에 불타 오르기도 하죠. 상처를 받으면 정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곱씹고 되새기며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점점 메마르고 피폐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런다고 일이 해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벌어진 일이 해결되지도 않죠. 내 감정의 배출하는 것으로 엎질러진 물이 다시 주어 담기지는 않습니다. 기껏 해봐야 단절뿐입니다.
화초를 키우다 보니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가끔 가지를 쳐주어야 할 때가 있죠. 가령, 죽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그런 가지는 잘라 주어야 하죠. 그런데 자르는 것의 목적이 죽은 가지를 없애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르는 목적은 새로운 싹이 나고 새롭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감정도, 어떤 마음도, 어떤 상황도,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더욱 성장하고 자라는 쪽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복수는 단절이지만 이해와 용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성장이 되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입니다. 아픔이 있고 억울함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뒤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신없고 이성이 마비되는 그런 상황들이 우리에게 있죠.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화를 유발하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비는 그치게 되어 있고, 시간은 흐릅니다. 비 온 뒤 질척이던 땅 속에서는 또 다른 생기가 돌고 더 활발한 생명력이 자라죠.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분노를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억울함을 묻을 줄 알아야 하고요. 용서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이니까요. 그렇게 비바람 맞으며 성장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비바람 없는 인생은 심심해요. 아니 성장할 기회가 없죠. 평화로운 삶은 아무 역경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역경에도 잔잔하고, 비바람에도 평온한 마음을 갖는 것이 평화죠. 그래서 평화는 극도의 성숙입니다.
오늘도 비바람 부는 하루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내가 성장할 기회를 얻는 것이니까요. 오늘도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어제는 그런 것이 재수 없는 것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만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성숙해지는 기회를 얻은 것이니까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상처 뒤에 성숙한 나를 기대하며 오늘을 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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