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4:16~19 천사가 예루살렘 쪽으로 손을 뻗쳐서 그 도성을 치는 순간에, 주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뉘우치시고, 백성을 사정없이 죽이는 천사에게 "그만하면 됐다. 이제 너의 손을 거두어라" 하고 명하셨다.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다. 그때에 다윗이 백성을 쳐 죽이는 천사를 보고, 주님께 아뢰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바로 내가 이런 악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백성은 양 떼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그날 갓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셔서,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으십시오." 다윗은 갓이 전하여 준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곳으로 올라갔다.
다윗의 선택이 어떤 기준에서 나온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윗의 선택이 옳은 방향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어제 묵상했죠. 이미 가뭄과 도망자의 신세를 경험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처참했는지 너무도 잘 알죠. 흉년이 왕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고대에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또한 도망이라고 하면 치가 떨릴 만큼 인생의 반이 도망자의 신세였던 다윗이죠. 게다가 7년이나 3개월보다는 3일이 훨씬 쉬워 보였을지 몰라요. 물론 제 생각이 짧은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윗의 선택을 옹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삐딱한 것일까요? 그런 눈으로 보아서 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일이 벌어집니다. 생각지도 못한 그 전염병의 처참한 광경에 다윗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 몰랐던 거죠. 그래서 부리나케 엎드리며 참회의 고백을 하죠. 죄는 자신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자신의 잘못을 면피하려 했던 다윗의 마음 상태가 드러난 증거라고 생각해요. 잘못을 인정하려면 남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를 하려면 상황 탓도 필요 없어요.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은 회개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회개는 자신에게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내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고, 환경이 그랬으니 봐달라는 합리화는 불필요합니다. 또 잘못은 같이 한 것이라고 남들을 끌어드린다고 해서 내 죗값이 경감되거나 희석되는 것도 아니죠. 잘못을 인정하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그건 내 잘못이라고 말이죠. 우리의 회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죠. 또 우리의 회개가 새로운 출발점이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묵상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다윗이 진정한 회개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멈추셨다는 점입니다. 다윗이 놀라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놀라셨고, 다윗이 돌이키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멈추십니다. 이는 우리의 회개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이 여기신다는 것이죠. 그분의 긍휼은 우리의 회개와 무관하게 이루어지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상관없이 펼쳐집니다. 이를 두고 요한 1서 기자는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칼을 쓰시는 분이며 진노의 화신이고 또 끝까지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말이죠. 물론 하나님은 심판을 하십니다. 그분에게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끝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우리에게 강한 요구와 가르침은 사랑의 표현임을, 우리에게 회개와 기도, 그리고 신앙과 믿음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잊습니다. 그리고 오직 심판의 하나님, 잘못한 것을 벌하시는 하나님으로만 기억하죠. 그래서 늘 내가 뭘 잘못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눈에 나지는 않았는지 전전긍긍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니 신앙은 늘 죄짓지 않는 데에만 국한되어 있죠. 말씀드렸죠? 죄를 묵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요. 우리가 묵상하는 것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묵상하고 있으니 우리 곁에 죄만 즐비할 뿐이죠. 나쁜 상황을 묵상하고 있으니 나쁜 상황만 보입니다. 심판의 하나님만 묵상하니 심판받을 두려움만 계속되죠. 끊어야 합니다. 오해를 풀어야 하고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묵상할 것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것은 나를 지배하고 꼼짝 못 하게 괴롭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고 좋게 봐주시며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나를 나 이상으로 좋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형편없는 마음과는 달리 자녀로 봐주시는 하나님이죠. 그렇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p.s. 사족입니다. 어제 잠깐 말씀드렸죠? 공동체를 주신 이유에 대한 말씀 말이죠. 목회자를 곁에 두신 이유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 길잡이가 될 푯대로 세운 공동체를 두고 계십니까? 나를 바꾸고 새롭게 세울 선지자를 곁에 두고 계신가요? 그저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믿고 복종하고 기로에서 이정표로 삼을 마음의 선지자를 두고 계신가요? 자기만의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손 내밀어줄 이웃이 있습니까? 그런 이들을 꼭 곁에 두세요. 여러분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구해줄 믿음의 가족들을 곁에 두세요. 그 가족들은 평상시 이웃과는 달라야 합니다. 무슨 경쟁관계의 이웃도, 나를 잘 보이기 위한 이웃도 아닙니다. 이익집단으로서의 이웃도 아니에요. 무슨 동호회도 아닙니다. 오직 내가 빛을 잃을 때 나를 밝혀줄 이웃으로, 길을 내어줄 동역자로, 잠을 깨워줄 말씀의 도구로 곁에 두세요. 사실 그것이 교회인데요. 진정한 교회를 만드세요. 그 교회가 없으면 외롭습니다. 힘이 들고 내가 수렁에 있을 때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어요.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를 요청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런 교회는 여러분의 마음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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