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4:20~25 마침 아라우나가 내다보고 있다가, 왕과 신하들이 자기에게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아라우나는 곧 왕의 앞으로 나아가서, 얼굴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 물었다. "어찌하여 높으신 임금님께서 이 종에게 오십니까?" 다윗이 대답하였다. "그대에게서 이 타작 마당을 사서,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하오."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높으신 임금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좋게 여기시는 대로 골라다가 제물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번제로 드릴 소도 있고, 땔감으로는 타작기의 판자와 소의 멍에가 있습니다. 임금님, 아라우나가 이 모든 것을 임금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아라우나는 또 왕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주 임금님의 하나님이 임금님의 제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왕은 아라우나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내가 꼭 값을 지불하고서 사겠소. 내가 거저 얻은 것으로 주 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는 않겠소." 그래서 다윗은 은 쉰 세겔을 주고, 그 타작 마당과 소를 샀다. 거기에서 다윗은 주님께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다윗이 땅을 돌보아 달라고 주님께 비니,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
전염병의 재앙을 보고 다윗은 단을 쌓기로 합니다. 단이란 제사, 즉 예배를 의미하죠. 그 장소를 선지자 갓은 여부스에 있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정해줍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죠. 역대기하 3장에 보면 이 장소가 다시 등장하는데, 솔로몬 시대의 성전이 지어지는 곳으로 나오죠. 단 그 마당의 주인이 아라우나가 아닌 오르난으로 나오는데요. 이는 지역 사투리에 따른 다른 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 다윗이 이르자 주인인 아라우나는 모든 재물을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어서 아끼지 않는 마음 때문이겠지만, 사실 여부스라는 말은 이전에 예루살렘지역에 거주하던 가나안 민족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에 속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유대의 지배를 받는 소수자였던 셈이죠. 사울시대에는 심한 억압을 받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찾아왔으니 두려움에 떨며 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 모든 호의를 거절하고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말하죠. 별 것 아닌 이야기가 사무엘서 하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 하죠. 그러나 저는 이것이 주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혼자만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외부로 부터 오는 가장 큰 환란은 전쟁입니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은 나와는 상관없는 싸움이죠. 그러나 이를두고 하나님은 이 전쟁은 너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이는 그저 너희는 손 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이겨 주신다는 말씀도 아니에요. 이는 외부의 공격일지라도 그 문제를 푸는 방식은 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문제를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전염병에게 이유를 돌리지 않고, 다른 상황이나 환경 탓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죠. 그런 다윗에게 갓은 예배할 것을 간청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죠. 다시 말하면 잘못된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시키는 길입니다. 어둔 마음과 느낌을 버리고 좋은 기분과 믿음의 평안으로 나를 바꾸는 일입니다. 부정적인 느낌을 뒤로하고 내가 바라고 원하고 또 기대하는 것으로 내 몸과 마음을 채우는 것이 예배죠.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요. 수많은 비교의식 가운데 우리는 삽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아요. 태생적으로 불리하고 도와주는 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내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피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사회에 우리는 삽니다. 그래서 불만이 많아요. 하필 이런 처지, 이런 입장, 이런 환경에 태어나서 남보다 못하고 남보다 더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삶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할까요? 다시 다른 곳에서 태어나야 합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시죠. 상황의 거듭남도, 환경의 거듭남도 아닌 내 몸과 마음의 거듭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죠.
생각이 바뀌면 상황도 바뀝니다. 마음이 바뀌면 환경도 바뀌죠. 내 보는 눈이 바뀌면 찌그러진 타이어도 예술성 있는 작품으로 보이고, 내 기분이 바뀌면 대하기 어려운 사람마저 친구가 됩니다. 내게 있는 불만과 불안은 결국 나를 보는 나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나는 안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결국 강자에게 당할 약한 자로 점지해 놓습니다. 늘 나쁘고 안 좋은 환경에 놓인 불쌍하고 나약한 인간 취급을 하면서 거기서 울고 있는 자신만을 그리죠. 그 눈이 바뀌어야 내가 바뀝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가 나를 돕겠습니까?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결국 자신 혼자만의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나를 좋게 보는 훈련, 그것이 예배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다면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좋게 보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요.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용서하시고 나보다 더 많이 나를 응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그러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 용기를 얻어 자신만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승리입니다. 그렇게 승리한 이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죠. 오늘도 상황이 나를 도와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나를 도와야죠. 내가 나를 아껴야 합니다. 내가 나여서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기 때문이죠. 그때 주님의 손길이 임하고, 그때 주위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내가 변하면 내 주위가 변하고, 그렇게 삶은 개척해 내는 아름다운 여정이 되죠.
오늘 이 아침, 나를 칭찬하며, 나를 응원하며 시작하는 하루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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