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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87 -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세요. 예레미야 3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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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희년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7년마다 정해진 안식년이 7번째 돌아오는 해, 즉 50년이 되는 해가 희년인데요. 그 해는 하나님의 공평이 실현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한 해가 됩니다. 희년이나 혹은 희년의 기초가 되는 안식년의 내용은 다양합니다. 그중에 종과 관련된 것이 있는데요. 신분상이든, 빚을 져서든 노예가 되어 사는 이들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경우로든 7년째가 되는 해에는 자유인이 될 자유가 종에게 주어집니다. 그때 주인은 모든 것을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증표를 성전에서 선포해야 하죠. 마치 이는 용서의 개념과도 같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경제적이든, 감정적이든,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 용서가 되죠. 종을 풀어주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누군가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악하기로 소문난 시드기야 왕이 이런 종에 대한 희년을 선포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도 이를 칭찬하시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반전이 있네요. 그렇게 자유인을 만들어준 그 종들을 또다시 종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분명 노예에서 풀려난 이들을 다시는 노예로 삼을 수 없음을 선포하고도 그들은 다시 그들을 노예 삼아 버렸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약자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약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빚진 자가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그다음부터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빚이 없어져서 짐이 가벼워졌을 뿐,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빚더미에 싸일 확률이 높죠.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방된 종이 자유의 몸으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종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경우로 본다면, 시드기야의 희년 선포는 흉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율법에 있으니 선포한 것입니다만 그 율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자유와 함께 돌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국가 정책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표어 같은 결정들은 잘합니다. 소위 탁상공론이라고 하죠. 그럴듯하고, 보기 좋은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러나 정작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아요. 빚을 탕감해 주어도 또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직업여성을 없앤다고 선포했지만 그 여성들의 일자리는 마련되지 않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경우들이 생기죠. 이런 흉내들은 희망 고문을 낳죠. 시드기야는 율법을 지킨 것처럼 생색을 냈지만 현실은 제자리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질타하시죠.

그러나 이런 경우는 시드기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나타납니다. 매 주일 예배의 자리를 지킵니다. 용서하겠다고 다짐하고, 사랑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마음먹고, 감사와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다시 제자리입니다. 분명 눈물로 회개했는데, 회개했던 일들이 다시 벌어집니다. 작심삼일, 아니 작심일일입니다. 왜냐하면 흉내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것을 형식주의라고 하고, 이런 것을 전시행정이라고 하죠. 우리의 신앙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책상에 앉아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읽는 것에 국한하지 않아요. 그 말씀이 나의 삶이 되는 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참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을 치고, 나의 시선을 주님께로 교정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물론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운동으로 건강해지지 않듯이 말이죠. 그러나 운동은 매일 해야 합니다.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지금 당장 알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운동해야 하죠. 단순히 헬스장에 간다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 오면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목장에 참여해서 진지하게 말씀을 나눠야 하고요. 그 방법이 옳든 그르든 최선을 다해 참여해야 합니다. 그저 교회 온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형식주의가 되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진짜로 하고 있는 줄 안다는 것이죠. 정작 형식만 있을 뿐인데 본인은 내용이 있는 줄 안다는 겁니다. 그런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 사탄의 가장 큰 전략이기도 하죠. 그런 이들에게는 말씀이 심겨지지 않습니다.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형식주의 신앙을 싫어하십니다. 시작만 하다 끝나는 것을 싫어하시죠. 끝이 없는 시작은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주의는 끝이 없는 시작을 늘 반복합니다. 그래서 매일 시작만 하죠. 성경일독, 시작만 하지 끝이 없잖아요. 용서, 시작만 하지 끝이 없습니다. 용서의 끝은 사랑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형식이 아닙니다. 삶입니다. 신앙은 폼생폼사가 아닙니다. 끝까지 살아내는 끈기입니다. 위대하고 멋지 표어가 아니라 작은 실천이 신앙의 척도입니다.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정하셨어요? 끝까지 하세요. 시작을 하셨어요? 그러면 멈추지 마세요. 마음을 정하셨어요? 그러면 바꾸지 마세요.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이 임하는 그 날 결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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