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착잡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오히려 핍박을 받는 예레미야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항아리를 깨뜨리며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예레미야를 바스훌이 보았던 모양입니다.
바스훌은 제사장으로, 성전을 총감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를 채워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차꼬는 손이나 발에 채우는 수갑의 일종이죠.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하신 설교 가운데 팔복이라고 이름 붙여진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에 이런 말씀이 있죠.
마 5:11~12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레미야가 딱 그 상황에 속하죠.
이스라엘을 위해,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요.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거룩한 길로 가게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요.
돌아오는 것은 맞고, 갇히는 것인 거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 잘 될 것이라고 믿죠.
주님의 뜻대로 살면 삶의 편한 길이 열리고, 술술 풀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기면 당연히 낙심하게 되죠.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너무 힘들고, 낙심돼서 못해 먹겠다고 소리치죠.
잘못을 하고 욕먹는 것은 오히려 낫습니다.
잘못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잘하려고 하다가 욕을 먹으면 견디기 쉽지 않아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더 낙심되죠.
하물며 자신을 희생하며 사역자로 살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힘듭니다.
어디선가 들은 예화가 있어요.
교회에서 가족 찬양대회가 있었데요.
비교적 초신자에 속하는 어느 분 가정이 찬양을 했는데요.
찬양 가사를 잊어버려서 찬양을 망치고 말았답니다.
사람들은 웃고 즐거워했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 창피해서 몸 둘 바를 모르더래요.
목사님 가정이 노래할 차례인데 그런데 목사님도 가사를 틀려 그만 엉망이 되었답니다.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도 찬양을 모른다고 농담 반 진담 반 놀리더래요.
그런데 훗날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공개된 일기장에는 그날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더랍니다.
그 초신자 성도가 상처받지 않도록 자신도 일부러 노래를 망쳤다는 사실이 적혀있더래요.
그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더랍니다.
“그나마 그 성도님이 안도하며 표정이 풀리는 모습에 나의 할 일은 이것이구나 싶었다.”
어쩌면 작은 일이지만,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일은 여전히 힘듭니다.
그런 모습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차라리 좀 낫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오히려 오해하고 곡해하고 짓밟아버리면 억울하죠.
예레미야도 억울했던 모양입니다.
우리나 예레미야나 사람인지라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했던 모양입니다.
“다시는 내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나 봐라”
우리도 마찬가지죠.
좋은 일 하고 욕먹으면 마음의 결심을 하죠.
“다시는 내가 널 도와주나 봐라”
거기까지는 똑같은데요.
예레미야에게는 특별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 적혀있네요.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우리에게 불평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라요.
우리가 선한 일 하다가 낙심하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면 더 큰 낙심이 오죠.
여기까지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낙심될 상황 앞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이 신앙은 아니에요.
오해받는 상황을 쿨하게 넘기는 성격이 믿음도 아니죠.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다 마음에 남고, 심령은 상해가죠.
진짜 은혜는 이것인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낙심하고, 좌절하고, 다시는 안 하고 싶은 마음의 결심을 했는데도, 그때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서 다시 새롭게 일어서는 것 말이죠.
마치 오뚝이처럼 넘어지고 깨어지고 부서지는데도 다시 일어나는 은혜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안 넘어지려고 해요.
쓰러지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죠.
그러나 안 넘어지는 사람도, 상처 없는 사람도 없어요.
예수 믿어도 넘어지고, 상처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그래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다음 과정이죠.
안 넘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안 쓰러지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축복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아파도 회복되는 은혜,
어려움이 와도 이기는 은혜,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은혜,
바로 십자가의 축복이 우리 안에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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