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경고는 여호야김 왕을 향한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원래 이름은 엘리야김이었죠. 요시야 왕이 죽은 뒤, 유다 백성은 어떤 이유로인지 첫째인 엘리야김이 아닌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석 달만에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죠. 그리고 세워진 왕이 엘리야김입니다. 이집트에 의해 세워진 왕인 셈이죠.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집트 왕 느고는 그의 이름을 엘리야김에서 여호야김으로 개명을 시켰습니다.
여호야김은 그렇게 1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집트의 꼭두각시 왕으로 군림했다고 해야겠죠. 그동안의 통치 활동은 한마디로 폭정의 나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열왕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혈안이 된 것은 둘째 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습니다. 선지자 우리야가 그의 손에 죽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붙잡고,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태워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지나친 세금을 거둬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죠. 세금정책의 빌미는 이집트 왕 느고에게 있습니다. 그는 유다를 속국으로 만들고 세금을 받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그 세금을 백성에 전가시킨 것은 물론, 더 많은 세금을 거둬 자신의 궁전을 짓고 호화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결국 이집트를 배경 삼아 자신의 권리를 누린 결과죠.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외부로는 불의와 억압, 각종 유혹과 두려움에서부터, 내부적으로는 게으름과 나태, 개인주의와 욕망 등의 문제들을 극복해야 하죠. 마치 여호야김이 유다의 지도자로서 외세인 이집트의 압제와 내면의 권력 기득권에 대한 유혹을 극복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극복보다 타협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타협을 넘어 오히려 이용할 때가 많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포기와 단념들이 줄을 이으며 상황 탓을 하고, 이기려 하기보다는 현실에 눌러앉아 적응하려고 애를 쓰죠. 더 나아가 그 상황을 이용하려고 듭니다.
다림교육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시작하게 된 동기가 지역 복지관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어교육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학원에서 잔뼈가 굵은 어머니 봉사자가 자원을 하셨습니다. 다림에서 중학생들을 처음 가르치는 것이었고, 게다가 복지관을 통해 온 학생들만 교육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대단한 도전이자 실험이었죠. 그런데 이 실험은 보기 좋게 6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자원봉사로 나선 어머니는 완전히 넉다운이 되었고,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였죠. 프로그램을 접고 원인과 문제점을 정리하다가 안 사실들이 있었어요. 복지관에서 관리하는 학생들을 보니 모두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이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복지관에서 이들을 돕는 일은 정말 잘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알고 보니 복지관이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복지관을 돕고 있는 형태더라고요. 무슨 말인고 하니,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공개적으로 돕다 보니 아이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아이들은 또래집단에서 이미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로 낙인이 찍혔고요. 자신들의 상황과 환경을 극복하고 도움의 마중물로 한 걸음 향상해야 할 프로그램이 그저 도움에만 그치는 그런 복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마치 복지관은 아이들이 있어줘서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이고, 아이들은 복지관을 배경으로 수급자의 권리를 누리는 식의 제자리 행정이 이루어진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굳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킬 의지가 없었던 것이죠.
이런 현상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똑같이 우리에게도 벌어집니다. 이겨내고, 극복할 상황들에 오히려 안주하는 모습들이 있죠. 여호야김은 유다의 왕으로서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꼭두각시로 자신을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한 권세를 누리죠.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우리에게 몰려오고, 악한 마음의 유혹들도 끊임없죠. 그것을 이겨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야 할 우리가 오히려 그 속에 안주할 때가 있습니다. 늘 울기만 합니다. 늘 억울해만 해요. 늘 자신을 한탄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한탄으로 인정받으려 하고, 억울함으로 인생의 원동력을 삼으려 하죠. 버티고 견디고 싸울 생각은 아예 접어버립니다. 그렇게 익숙해지면 우리는 그나마 있는 권세를 나를 위해 쓰게 되죠.
이런 인생은 미래가 뻔합니다. 여호야김은 그렇게 이집트를 믿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갔지만 그가 믿은 이집트는 얼마 안 가서 바벨론에게 패망하게 되죠. 이집트의 충실한(?) 종이었던 여호야김 역시 바벨론의 타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곳이 어떤 곳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내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하면 싸워야 하고, 견디고 극복해야 하면 끝까지 버티며 기다려야 하고, 변화시켜야 하면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주신 전쟁터입니다. 세상과 싸워 하나님의 향기를 발하게 하는 전쟁터죠. 그곳에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하루는 치열하게 싸우는 하루이길 빕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힘들어요. 미루면 미룰수록 쌓입니다. 매 순간, 매 시간, 나의 삶은 주님이 주신 사명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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