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3:11-34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정말 난감한 말씀들로 가득찼습니다.
때론 말씀 가운데 우리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고
그분의 길과 우리의 길이 달라서
오해하고 곡해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의문투성이의 말씀들입니다.
간단히 내용을 정리하자면 두 사람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남유다 출신 하나님의 사람과 베델의 늙은 예언자가 그들입니다.
남유다 출신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여로보암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고 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간청도 뿌리치고 접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서는 먹지고 마시지도,
그리고 온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델의 늙은 예언자의 말에 속아 이 말씀을 어깁니다.
그리고 그는 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반면 베델의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속이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대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과 같은 예언자라는 말에 그냥 믿어버렸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늙은 예언자가 더 나쁜 사람처럼 보입니다.
속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정작 죽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늙은 예언자는 그러고도 멀쩡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대목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신 것일까요?
늙은 예언자는 무슨 유익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일까요?
왜 죄에 대한 징계가 우리의 판단과는 다른 것일까요?
남유다 출신 하나님의 사람을 보노라면
사무엘상 6장에 등장하는 웃사라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운반하는 직무를 맡은 웃사는
운반도중 언약궤가 떨어질 뻔한 위기에 놓입니다.
그때 그는 언약궤를 지키기 위해 언약궤를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언약궤는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아니 어느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언약궤가 떨어지든 말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겠죠.
그가 오히려 언약궤에 대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웃사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감정으로는 용납되기 힘든 일이죠.
더 난해한 것은 늙은 예언자에 대한 것입니다.
남을 속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이 양반은
무사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난감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그는 왜 하나님의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드렸을까요?
속이면서까지 말입니다.
성경은 명확한 이유를 적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상상을 동원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를 베델의 늙은 예언자라고 적고 있습니다.
늙었다는 표현은 어쩌면 그가 이미 힘없고
한물간 사람이라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여로보암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도 죽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고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베델의 사람입니다.
베델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그곳에 여로보암은 우상들의 산당을 지었습니다.
어쩌면 지금껏 이 베델에서 예언자 노릇을 해왔을 이 늙은 예언자는
여로보암에게 가서 그 악행을 담대히 전할 역할을
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거죠.
이것은 용기가 없을 수도 있고, 자신감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어떤 이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로인해 그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담대히 전하고픈 열망이
생겼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하는 것에 대해
듣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인 것같이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에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하기를 열망하는 정도가 어떤지
상상이 가십니까?
늙어서 이제 포기할 만도 한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소망하는 말씀에 대한 갈망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속은 자와 속인 자, 혹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비로 보시면
말씀에 대한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두 사람을 따로 떼어 묵상해 보시죠.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어도
그 말씀에 대해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면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아무리 악인이어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부류의 예언자라면 괜찮겠지'라는 나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상식선에서 이해하려고 하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으로 재단을 하고 각색을 하기도 하죠.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상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미 끝났습니다.
한물간 예언자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그러나 태가 끊긴 사라에게도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고
도저히 우리 상식에 맞지 않는 부활도 주님은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상식으로 이해하거나 각색하려하지 마세요.
오히려 나의 상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게 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상식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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