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 8:22~25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들이 출발하여 배를 저어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런데 사나운 바람이 호수로 내리 불어서, 배에 물이 차고, 그들은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서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그들은 두려워하였고, 놀라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시니, 바람과 물조차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폭설과 함께 요란한 시작을 알린 올 겨울이 이제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조금 추위에 적응하셨을까요? 영하로 시작하는 하루를 이제는 가뿐히 즈려밟고 시작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는 넓은 관용의 마음을 읽게 됩네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마음을 가졌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할 어려움도, 참지 못할 힘든 일도, 나를 쓰러뜨릴 만큼 강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오늘을 시작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련을 하나님은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했는지도 몰라요. 오늘을 시작하는 이 순간, 반드시 기억하자고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풍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적이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이미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죠. 그래서 다른 요지의 해석이 불필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거라사]라는 곳으로 가시고자 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 동쪽 편에 위치한 곳으로, 예수께서 주로 사역하시던 곳에서는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가야만 했죠. 오늘 본문의 사건은 그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당시 조금 피곤하신 상태셨던 것으로 보여요. 많은 이들을 가르치시고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그의 공생애는 여행의 연속이었죠. 당연히 피곤하실만합니다. 그렇게 그분은 배에서 잠이 드셨죠.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일었던 것이죠. 보통 디베랴 호수로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분명 호수지만 성경에는 바다로도 적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히브리어로 [얌]이라고도 하고, 헬라어로는 [탈라싸]라고 하는 단어가 호수와 바다 모두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작은 호수가 아니었던 것이죠. 갈릴리호수의 면적은 166㎢로, 서울 전체 면적의 1/4을 조금 넘고, 성남시 전체 면적(141.7km²)보다도 큰 크기니까 바다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죠. 게다가 수면은 해수면보다 210m 낮고, 주위에는 높은 산들이 많아 풍랑이 잦다고 합니다.
이 광풍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아마도 뱃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을 거예요. 기습적인 광풍에 배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런 판국에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지 않으셨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죠. 그들이 예수님께 힘을 빌리고자 깨웠는지, 아니면 이런 와중에 잠이 든 예수님이 안타까워 깨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제자들과는 다르게 이런 상황이 대수롭지 않으신 듯, 바람과 성난 물결을 향해 잠잠하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이 장면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바람과 풍랑을 향해 꾸짖다니요? 그런데 그 꾸짖음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은 잠잠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연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의 아들인 예수님의 권능을 찬양하기도 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 본문의 핵심은 자연현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우리의 믿음의 원천에 대한 질문이에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또 다른 성경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래전, 다시스로 가던 배도 풍랑을 만났었죠. 큰 풍랑이 일자 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 밑에서는 그런 상황과는 관계없다는 듯 자고 있는 사람이 있었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던 선지자 요나였습니다. 묘하게도 오늘 이 본문은 요나의 그 상황과 흡사해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에 대한 정황을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요나의 사명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잠시 접어두고, 그 배 현장의 얘기만 해보자고요. 오랜 시간 뱃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면 엄청난 풍랑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들은 죽게 되었다고 소리 지르며 가진 소유를 다 물에 던졌지만 소용없었죠. 아마도 그 배의 모든 것을 던진들 소용없었을 것입니다. 그 배를 구원할 사람은 요나뿐이었으니까요.
잠에서 깬 요나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죠.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바다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그 배의 구원은 요나의 던져짐으로 이루어진 셈이죠. 그 배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에게 요나는 구원이었고, 십자가였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후, 큰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살아났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똑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지 요나가 몸을 던져 풍랑을 잔잔케 했던 것을 예수님은 말씀을 던지셨을 뿐이에요.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말씀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 아닐까요?
믿음의 삶, 용기와 결단의 삶, 그렇게 이 땅에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살려면 우리 안에 먼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이 있으신가요? 말씀이 있느냐고 물으면 무슨 증표 찾듯이 성경책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외람되지만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심부름을 한다고 치자고요. 아버지께서 나에게 라면을 사오라고 시켰다 치죠. 제가 간 가게에는 라면뿐만 아니라 과자도, 아이스크림도 있죠. 그 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것이 아닌 라면을 사갈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저에게 아버지의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라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 안에 아버지의 말이 없다면 저는 다른 것을 사갔을 거예요.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의 말이 있었고, 그 말을 믿었고,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영으로는 믿음이고, 삶으로는 순종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오늘 본문의 상황이 꼭 제 마음속 같았어요. 평온하다가도 어떤 시점에는 광풍이 일어나기도 하죠. 때론 외부의 자극에 의해 출렁거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몰려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덮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 두려움에 빠지면 온몸이 마비되고 이성은 잠들어 버리죠. 내면에 쌓인 방어기제로 긴장과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반응들은 더욱 자신을 고립시키죠. 그럴 때면 저는 마치 작은 병에 갇힌 병든 병아리처럼 초라해져 버리고 맙니다. 무서운 파도 앞에 고작 두려움을 던지고 서 있는 나는 더 큰 파도와 대면해야 하죠. 왜냐하면 내 앞에 출렁이는 파도는 나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나는 고작 절망과 분노의 한숨을 던질 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내 발밑의 물결은 더 신나서 춤을 추죠. 왜냐하면 나의 낙심과 절망, 한풀이의 한숨은 그들의 먹잇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절망과 대면해 보셨죠? 낙심과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과 마주해 보신 적이 있으시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에 그분은 거대한 두려움 앞에 직면하셨어요. 우리는 그분의 광야 시험을 무슨 출정식의 자랑거리쯤으로 여기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광야의 시험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경험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때 그분은 어떻게 그 상황을 이기셨을까요? 그 사탄의 속삭임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때 그분을 살리시는 것은 바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 서죠. 사울왕을 비롯한 어른들은 그 앞에서 한탄과 두려움으로 절망의 한숨만을 던지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은 말씀을 던집니다.
사무엘상 17:47 "또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흔드는 일들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뜻밖의 일들이 우리 앞에 진을 칠지도 모릅니다. 나의 처지를 봐주는 일이 없는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려 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죠. 그때 여러분은 그들의 면전에 던질 말씀이 있습니까?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히고 포기하고 싶을 때, 눈물이 앞을 가리고 더 이상 기도마저 드릴 자신이 없을 때, 그때 나를 조롱하고 조정하려 드는 그 풍랑에 던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신가요?
마태복음서 6: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요한일서 5:4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신명기 31:6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내십시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가시면서, 당신들을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 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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