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 8: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정말 첫눈이 요란합니다. 마치 팡파르처럼 겨울이 찾아온 것을 환호하듯 온 대지를 덮어버렸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더 요란한 환영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환영받기 원하는 겨울을 특별히 더 반갑게 맞이했네요. 우리에게는 다소 불편한 눈길도 누군가에게는 피와 살이 되는 귀한 생수가 될 것을 기대하며 금요일 아침을 힘차게 시작합니다.
오늘은 4가지 땅 중에서 세 번째 땅 이야기입니다. '가시덤불'이 그 주인공이죠. 이미 눈치를 채셨겠지만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로 이어지는 각 땅들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길가'는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고, '돌짝밭'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이라고 되어 있죠. 차이가 느껴지시죠? 오늘 '가시덤불'은 어떨까요? '말씀을 들었으나'라고 되어 있네요. 비슷해 보이지만 '듣기는 하였으나'와는 좀 다른 느낌이죠? 굳이 차이를 두자면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는 듣기는 들었지만 흘려들었다는 것이고,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이란 말은 듣고 순종하지만 가슴에 새겨 기억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보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었으나'는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앞의 것들과 비교하면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금씩 더 나아지는 느낌이죠. 그런데 문제는 늘 '그러나'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을 '듣고도' 등 역접 접속사가 문제입니다. 꼭 토를 달죠. '예스'하면 되는데 꼭 '예스, [그런데]'를 달면서 딴 소리를 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죠. 사과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미안하면 미안하다고만 해도 되는데요. 꼭 "미안해.. 그런데.. 나도 할 말이 있다고.." 이렇게 이어져요. 그러다 보면 사과나 미안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또 다른 변명과 합리화만이 난무해집니다. 순종은 뒷말이 필요 없어요. 하면 하는 겁니다. 믿으면 믿는 거고요. 따르면 다 감수하고 따르는 거죠.
자! 다시 본문에 집중하겠습니다.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마음에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를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죠.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렴풋 떠오르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것은 두려움이죠. 근심이 두려움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뭐 설명이 필요 없겠죠. 그런데 재물이 왜 두려움과 연관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왜 부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이 쌓은 재물로 할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으세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적이 있어서 재물을 쌓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많은 경우 드러나지는 않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난함에 대한 두려움이 그 동기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생의 향락은 어떨까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단순하게 말초적 자극이라고 해 보자고요. 왜 우리는 그런 말초적 자극을 원할까요? 좀 더 심하게 말해서 왜 우리는 술 취하기를 원하고, 마약에 빠지는 것일까요? 그게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두려움의 회피가 더 적확한 정답일지도 몰라요. 두려움에 대한 도피, 현실에 대한 회피가 그 이유죠.
이것을 가시덤불이라는 형태로 묘사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기막힌 표현이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마치 우리 안에 돋아있는 가시 같기 때문이죠. 시쳇말로 발작버튼이라는 말을 요즘 사용하더라고요. 어느 순간, 화가 폭발하고,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해 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잘 지내다가도 말 한마디에 씻지 못할 상처를 받고, 잘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자신감을 잃고 잠수를 타는 경우도 있죠. 그게 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가시 때문이죠.
하덕규목사의 노래 [가시나무]에는 이런 가사가 있어요.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그런 슬픈 마음을 시인 하덕규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시 많은 나, 가시 돋친 마음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하며 고백하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주님의 쉴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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