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 8:19~21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로 왔으나, 무리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께 전하였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모처럼 따스한 하루였죠? 오늘 새벽은 다시 쌀쌀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에 짜증을 느끼죠.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이게 놀리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었다면 어떨까요? 지난 한 주간 추위로 움츠렸던 어깨를 조금이나마 펴고 따스한 햇살을 느끼도록 잠시 우리에게 허락된 선물 같은 하루였다면 어떻습니까? 그 마음이 훨씬 기분이 낫죠? 세상에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힘들게 하는 일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한들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나를 위한 선물로 받으면 나에게는 버릴 것이 없을지도 몰라요. 오늘도 선물 같은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관련된 이야기가 지속되다가 갑자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죠.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집을 떠나신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예수께서 공생애 이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래서 대적하는 이들도 생겨났죠. 어쩌면 그런 소식을 들은 가족이라면 걱정을 했을지도 몰라요.
그들이 어떤 이유로 찾아왔든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족들과 만남을 거부하십니다. 심지어 그들을 가족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시죠. 언뜻 가족들에게 매우 냉정하신 모습을 보입니다. 이 구절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예수님은 매우 모질고 냉정한 분처럼 보이죠. 특별히 가족에게는 선을 긋는 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맥락을 따라 읽을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죠. 문해력이라고 하죠?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작게는 그 구절의 전후 맥락에서부터 크게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말씀의 핵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성경을 보더라도 믿음과 이해의 폭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죠. 가령, 어떤 사람을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을 절어요. 그러면 우리는 대부분 그에게 장애가 있다고 느낄 테죠. 그런데 오래 알아온 사람은 그가 잠시 다쳤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애로 생각하지 않죠. 더 나아가 그가 다친 이유가 남을 돕다가 다쳤다는 것까지 안다면 그 사람은 그의 발 절음을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있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등장하죠. 그런데 그 등장하는 타이밍이 이 세 복음서 전부 달라요. 오늘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이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같이 등장하죠. 그런데 마태복음서에는 주인이 없는 마음에 일곱 귀신까지 데리고 돌아오는 귀신의 비유 다음으로 등장하죠. 이들의 원본 격인 마가복음서에서는 심지어 예수님께서 바알세불, 즉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이 난 이야기 뒤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잠시 등장하는데요. 그들은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죠.
이렇게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등장하는 오늘 본문에서는 맥락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전후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다른 이야기 속의 핵심을 찾아 들어가면 실마리가 풀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잠시 앞서 언급한 각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에 나오는 귀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귀신이 아니죠. 귀신이 사람의 마음에 일곱 귀신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비워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마음의 주인이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분 좋게 살 것인지 아닌지 선택을 해야 하죠. 좋은 눈으로 보기를 결정한다면 어둠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반면 그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아도 어둠이 깔리죠. 이 귀신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주인을 결정하라고 말이죠.
마가복음서의 바알세불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바알세불은 귀신 가운데 대장 귀신을 의미하는 단어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적이 귀신의 능력이라고 치부했습니다. 사탄의 권세로 기적을 행한다고 폄훼했죠.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서 3:28,2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을 것이지만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이는 영원히 그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두 말씀은 우리 마음에 주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동일한 말씀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죠.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씨 뿌리는 일에 전념하는 인내를 배웠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향해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고 열매 맺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은 그렇게 인내의 열매를 기다릴 줄 알죠. 이것이 공통된 주제입니다.
자! 이제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맥락 속에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가복음서 8: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이 말씀은 가족들을 배척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이 나의 가족이고 나의 형제임을 선포하시는 말씀인 거죠. 이는 혈육보다도 믿음의 가족이 더욱 귀하고 값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거예요. 어쩌면 믿음의 공동체, 같은 미래를 꿈꾸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낫게 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이 우리에게 귀한 존재임을 알려주시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그보다 더 진한 것이 있어요. 보혈은 혈육보다 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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