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2~11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제법 견딜만할 정도로 더위가 꺾인 듯하죠? 기분 탓일까요? 이러다가 또 더운 기운이 다시 몰려올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전의 더위는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시간은 늘 전진하니까요. 이제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하세요. 몸도 마음도 가을하늘처럼 맑고 드높은 여유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랜만에 길죠.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본문을 우리는 여러 차례 곱씹어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말씀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읽는 순간마다 또 다른 의미가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이 특별히 그렇습니다. 잘 아는 장면이고 말씀인데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몰려왔기 때문이죠.
일단 오늘은 이 말씀의 배경과 의문점에 대해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으셨나요?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계시죠. 그곳에서 놀랄만한 일도 벌어집니다. 이에 놀라는 베드로와 주위 사람들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장면이 왜 이상할까요? 그것은 이미 우리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가셨고 심지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에 대해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베드로는 이미 아는 사이라는 것이고 게다가 이미 이적을 경험한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낯설죠. 오히려 제자로 부르시고 장모를 고치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시간적 연결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다음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것으로 되어있죠.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기록에 시간적 오류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잠시 착각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이해하고 이 본문을 읽었드랬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아침에 묵상하는 말씀은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이고 성서해석학적 고찰은 특별히 필요치 않습니다. 삶에 적용할 말씀으로 우리에게도 충분히 이해와 깨달음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건의 순서를 따지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죠. 성경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하는 데 그다지 애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시간을 따져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다음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순서를 따른 데 비해 누가복음은 그것이 거꾸로 되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그랬듯이 누가의 착각이었을까요? 사실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이전에 이 말씀을 읽을 때는 그렇게 지나갔는데요. 오늘 아침에는 유독 강하게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고 또 읽었어요. 그리고 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적인 해석인만큼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들어주세요.
만약 예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를 보시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기적까지 체험했죠.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일터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다시 찾아오셨죠. 그리고 또 다른 이적을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베드로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죠.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순종을 찬양하지만 사실 베드로의 속마음은 '이 일은 내가 더 잘 알아요'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다가 되돌아간 이유가 이것일지도 몰라요. 자신이 바랬던 메시아와 달라서였을지도 말이죠. 더 나아가 이적을 보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면 좀 뜬금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전에 예수님을, 자신이 바라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전적을 놓고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죠.
어떤가요? 이런 해석도 재미있지 않나요? 그런데 이 해석이 재미만으로 제게 다가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선언했죠. 그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마치 첫사랑에 흥분하고 달아오르듯이 예수님과의 첫 마음이 그랬죠. 그런데 지나 보니 뭔가 허전합니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되는 것이 없고, 내가 원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죠. 돌아보면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것들이 이루어진 것도 많죠. 아파서 고생할 때 낫게만 해 주시면 뭐든지 하겠다고 기도했는데 어느새 나았어요. 그런데 그런 은혜나 사랑은 먼 옛 추억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렇게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넘어갔죠. 제자인지 아닌지 자신도 헛갈리는 지경에 이른 지 오래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지금 그런지도 몰라요.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금이 처음인 듯, 우리의 속마음을 감춰주시듯이 마치 처음처럼 다가오셔서 손을 내미시죠.
'걱정하지 마, 너는 여전히 귀한 사람이니까. 이제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과거에 어쨌든 괜찮습니다. 믿음이 좋았든 나빴든, 무슨 설레발을 쳤고, 또 어떤 배신을 했든, 다 괜찮습니다. 많은 사고를 치고 원수였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이었든 상관없어요. 지금, 지금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잡으세요. 오늘 내 마음을 두드리시는 주님께 문을 여세요. 지나간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오직 새일을 행하실 것만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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