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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09 - 옳은 것은 사랑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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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8:19~33   그때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말하였다. "제가 임금님에게로 달려가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원수에게서 구원하셨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말렸다. "오늘은 아무리 좋은 소식이라도, 네가 전하여서는 안 된다. 너는 다른 날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도 된다. 그러나 오늘은 날이 아니다. 오늘은 임금님의 아들이 죽은 날이다." 그리고는, 요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네가 가서, 본 대로 임금님께 아뢰어라." 그러자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요압에게 절을 하고 달려갔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또다시 요압에게 말하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저 에티오피아 사람과 같이 가서 보고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요압은 또 말렸다. "아히마아스야, 네가 왜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가 보아야, 이 소식으로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한다." 아히마아스가 또다시 말하였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저도 가겠습니다." 요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더 말리지 않겠다." 아히마아스는 요단 계곡을 지나는 길로 달려서, 그 에티오피아 사람을 앞질렀다. 그때에, 다윗은 두 성문 곧 안문과 바깥문 사이에 앉아 있었는데, 파수꾼이 성문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성벽 위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어떤 사람이 혼자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파수꾼이 큰소리로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니, 왕은 "혼자 오는 사람이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점점 더 가까이에 이르렀다. 파수꾼이 보니, 또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파수꾼이 큰소리로 문지기에게 "또 한 사람이 달려온다" 하고 외치니, 왕은 "그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파수꾼이 또 알렸다. "제가 보기에, 앞서서 오는 사람은 달리는 것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올 것이다."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가까이 이르러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며, 얼굴이 땅에 닿도록 왕에게 절을 하며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신, 임금님의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왕이 "그 어린 압살롬도 평안하더냐?" 하고 물으니, 아히마아스는 "임금님의 신하 요압이 이 종을 보낼 때에,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마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왕이 "물러나서 곁에 서 있어라" 하고 말하니, 그는 곁으로 물러나서 서 있었다. 바로 그때에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들어왔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왕에게 아뢰었다. "높으신 임금님께 기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을 없애 버리시고, 임금님께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왕이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물었다. "그 어린 압살롬이 평안하더냐?" 에티오피아 사람이 대답하였다. "높으신 임금님의 원수들을 비롯하여, 임금님께 반역한 자들이 모조리 그 젊은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성문 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울었다. 그는 올라갈 때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울부짖었다.


오늘 본문은 좀 깁니다. 그러나 내용은 간단합니다.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전쟁의 승전보를 다윗에게 전하기 원하죠. 이미 그는 후새의 비밀 첩보를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전한 바 있습니다. 그는 전령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압이 가로막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묘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승리한 전쟁이지만 그러나 다윗의 아들이 죽은 전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소식이 다윗에게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아히마아스 대신 에티오피아 사람을 전령으로 보낸 것은 이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름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는 이해와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모른다고 해버리죠. 물론 그는 압살롬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했어요. 이 부분을 가지고 여러 해석이 나옵니다. 그가 한 보고는 상을 받기 위해서 좋은 소식만 전한 결과라는 말에서부터, 다윗의 심정을 헤아려 충격을 덜기 위해 선한 거짓말을 했다는 해석까지 다양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고, 그 속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죠. 사람의 마음을 추정키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본문을 읽게 되네요.

 

일단 제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다윗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전쟁의 승리일까요? 아니면 압살롬의 살아있음일까요? 과연 다윗은 어떤 것을 더 기대했을까요? 그 일단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한 대로 아히마아스는 승전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첫 반응이 압살롬의 안부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다윗의 이중성을 봅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 아무리 아들이지만 전쟁을 한다면 이기고 지는 문제가 확실하죠. 게다가 반역의 우두머리를 살려두는 전쟁은 있을 수 없죠. 아무리 아들이라도 말입니다. 차라리 아들이 중해서 그를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죠. 깨끗이 자신이 물러서고 왕위를 물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왕위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죠. 그것을 믿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전쟁에 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하고 마음은 딴 데 있으니 이게 이중성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죠. 결정은 이렇게 하고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는 경우들 말이죠. 내 뜻이 있었지만 모두가 합의하고 세운 결정들이 있어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계속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자신의 뜻을 버리지 않아서 내분을 만들고 추진을 방해하는 일들이 있죠.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뜻을 따르기는 하는데 마음은 따르지 않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다음 장에서 나오지만 이 때문에 다윗의 군대는 목숨을 걸고 치른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죄인처럼 고개를 못 들고 돌아옵니다. 다윗을 위해 싸웠는데 마치 다윗을 배신한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오죠. 이게 뭡니까?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추라는 말인가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렇게 읽습니다. 아히마아스와 다윗의 반응을 비교하는 메시지로 말이죠. 그러니까 아히마아스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은 아히마아스와 다윗을 비교하는 본문이라고 말이죠. 그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어찌 100%의 결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에서 승리의 기쁨이 있지만 어느 한 편에는 희생자의 슬픔도 존재하죠. 어렵게 성취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비롯된 아픔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히마아스는 그런 양면성의 전쟁에서 기쁜 승전보만을 생각했습니다. 희생의 아픔도, 동족상잔의 고통도 있는 전쟁입니다. 전쟁이 어찌 즐겁기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상황과 어려움들을 넘어 보다 큰 차원에서의 결과를 아히마아스는 생각하죠. 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만 들고 다윗 앞에 나타납니다. 할 말 참 많지만 그 말들을 다 뒤로하고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찬양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죠. 반대로 다윗은 전쟁 가운데 아들의 희생만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들이 죽으면 어쩌나? 잘못되면 어쩌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어요. 온통 그 슬픔만 곱씹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기쁨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승리여도 말이죠. 

 

우리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슬픈 예감만 담고 있는 마음이 있어요. 안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이 있죠. 그 마음에는 어려운 전쟁의 기적적인 승리도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다윗을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자원자들의 희생이 담긴 승리여도 감사는 발을 못 붙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수십 리 밖에서 뛰어와 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며, 위로와 격려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늘 슬픈 마음, 억울한 마음, 자신을 피해자로 보는 마음이 가득한 나는 한 가지 작은 실수, 작은 말 한마디에 그 많은 감사와 기쁨의 시간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 작은 아픔에 모두를 죄인으로 몰아버리는 습성이 우리 안에 있죠. 늘 슬픔 예감만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보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기 때문이고요. 그런 이들은 늘 친구를 잃습니다. 깊은 교제를 하는 사람들을 늘 잃어요. 다 자기를 외롭게 만들고 갉아먹는 짓을 하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나쁜 일도 말해야 한다고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으면 하세요. 그런데 나쁜 감정을 이길 수 있습니까? 나쁜 생각을 컨트롤하실 수 있으세요? 여러분은 사탄의 속삭임에 속지 않을 담력이 있습니까? 이길 수 있다면 하세요.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나쁜 생각은 상종을 하지 마세요. 나쁜 말은 입에 담지도 마세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해서 가르치려고도 하지 마세요. 옳은 말은 사랑뿐이고, 옳은 행동은 위로뿐입니다. 내가 품을 것은 좋은 생각이고, 기쁜 소식뿐입니다. 어떤 일에도 기쁜 것만 찾아내세요. 비록 그것이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 할지라도 내가 찾는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진주이니 진주만 바라고 찾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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