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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빌립보서묵상05 - 한정 없이 내려가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빌립보서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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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묵상은 중심은 ‘성장’과 ‘기쁨’이었죠.
우리가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생명력이라는 사실은 익히 압니다.
바울은 그 성장의 뿌리가 우리 안에 넘치는 기쁨이라고 말해주죠.
그 기쁨은 미래에 대한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가올 미래에 대처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에 대해 지금 갖는 태도가 있죠.
보통 그 태도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되죠.
하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 앞에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불안은 그 일이 안될 것이라고 예단을 합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또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죠.
이 태도의 특징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안 좋은 상황을 상정합니다.
모든 생각을 동원해, 최고의 안 좋은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죠.
그리고는 미리 결론을 내 버립니다.
‘안 될 것’이라고요.

또 다른 태도는 ‘기쁨’입니다.

최근에 프로야구에서는 비선수 출신의 한 야구선수가 데뷔했습니다.
이 선수는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과거 어디에서도 야구를 배워본 경험이 없어요.
선수로 활동한 적이 없는 그저 일반인 출신의 선수라는 뜻이죠.
그가 취미로 야구를 하다가 실력을 쌓아 프로 무대에 데뷔한 것입니다.
대단하죠.
왜냐하면 고교선수 출신 가운데서도 프로 무대에 데뷔할 수 있는 선수가 채 20%가 안 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 선수는 데뷔 무대에서 무실점 호투로 훌륭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큰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나요?’
이 질문에 그 선수가 한 말은 이거였습니다.
‘불안하거나 두렵기보다는 야구장에서 뛴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야구장에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신가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시나요?
혹시 벌써 결론을 내고 움츠리고 불안해하면서 미리 포기하지는 않으시나요?
아니면 그 자체가 기뻐서 기대하고 고대하며 바라시나요?
이 기쁨의 태도가 바로 믿음입니다.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잘 될 것을 바라며, 기뻐하는 태도 말이죠.
그렇게 바라면 보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보여요.
그래서 불안을 바라면, 그 불안이 비록 0.1%의 작은 것일지라도 마치 전부처럼 보이고요.
우리가 기쁘고, 행복한 것을 바라면, 그 행복이 비록 1%의 미미한 것일지라도 전부처럼 보이게 되죠.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7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28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 설명하죠.
이것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또한 이것도 두 가지네요.
‘하나가 되는 마음’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위에서 언급한 미래를 대하는 태도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하나가 되는 마음’이 이어져요.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경쟁심’과 ‘허영’이라는 두 단어가 나옵니다.
이게 하나 되는 마음을 방해하는 요소죠.
새 번역에서 ‘경쟁심’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개역 성경에서는 ‘다툼’이라고 번역되어 있죠.
이것은 단순한 티격태격이 아니라 패거리를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편을 먹고 다른 편과 싸우는 것을 말하죠.
마치 혈연, 지연, 학연 등의 계파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 개개인에게도 적용되죠.
서로 남에 대한 험담을 하며 서로 히히덕거리는 것, 자체가 계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치 나는 그렇지 않은 듯이 구는 모습이죠.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다 이해해 주고, 타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깎아내리는 것이 이 단어의 의미에요.
교회 안에서도 참석을 잘하면 좋은 교인, 그렇지 않으면 나쁜 교인,
봉사를 잘하면 괜찮은 사람, 봉사를 안 하면 잘못된 사람,
이런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다툼’이라는 거죠.

물론 저는 가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저급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헬스클럽에 가도 뜨문뜨문 다니는 사람은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하죠.
공부 또한 가끔, 한 달에 한 번, 하루 한다고 늘지도 않죠.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의식의 변화, 인식과 시선의 변화를 꿈꾸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잘 몰라도, 잘 안 되어도, 꾸준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서 그렇다거나, 혹은 나누는 말씀이 진리여서가 아닙니다.
차라리 다른 교회일지라도 꾸준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신자든, 헌 신자든, 늘 오는 이든, 가끔 오는 이든,
그것으로 구분을 짓고, 그것으로 편을 가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이든 의인이든, 심지어 그가 살인자여도 그것으로 편을 가르면 안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죄인, 그런 살인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누구보다 음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께서 살리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죠.

우리가 그렇게 경쟁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깎아내리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그 축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곧 나는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내가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살인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지목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허영’입니다.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며, 자신은 그 부류가 아니라고 여기죠.
남을, 사랑이 없다고 정죄하면서, 자신은 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허영’이라고요.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무리 비난해도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죠.
아무리 갖은 죄를 가져다 붙여도 억울해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화도, 억울함도 없는 사람이죠.
‘맞아.. 내가 잘못했어… 맞아.. 내가 죄인이야.. 미안해..’
저는 이런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이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누가 흔들어서 쓰러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그런 분들이 계시죠.
저는 말하지 않으면 억울하고, 변명하지 않으면 정말 내가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그런 불안이 없어요.
스스로 자신이 부족하고, 아직 멀었고, 더 잘하겠다고 말하죠.
저는 지금껏 해 온 것들, 하고 있는 것들을 남이 알아주길 바라고, 또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고, 그래야 내가 그렇게 살아왔음을 인정받을 것 같아서죠.
그런데 이런 분들은 그런 조바심이 없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심지어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죠.

그것이 겸손입니다.
한정 없이 내려가는 것,
한정 없이 억울한 자리로 들어가는 것,
한정 없이 남보다 낮은 자리에 임하는 것,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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