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1-10 우리에게 존중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권리주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죠.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니는 나귀가 하나 있었습니다.
주인은 매일 그 나귀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마을을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마을을 돌면 사람들은 모두 나와 나귀에게 절을 하는 겁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나귀를 맞아주고 환호해주고 하니 나귀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 것이죠.
그런데 어느날,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환호에 물든 이 나귀는
아침마다 져야 하는 무거운 물건이 싫어졌습니다.
이 무거운 물건이 없다면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돌아다닐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힘을 주어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등에 있던 짐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순간 날아갈 것같이 가벼운 자신을 발견했고, 이제 편하게 마을을 돌려고 했죠.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환호하는 사람들이 절하기는커녕 마치 잡아먹을 듯이 나귀를 쳐다보았습니다.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급변한 이 상황에 너무도 놀란 나귀는 자신의 등에서 떨어진 무거운 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짐은 마을이 대대로 섬기는 신상이었어요.
그제서야 나귀는 마을사람들이 절한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등에 있던 신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예화입니다.
어제 묵상 가운데 바울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지도자들을 대하는 초대교회의 태도와 현실을 보았어요.
초대교회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수직관계를 벗어나 수평의 관계로 세워진 공동체였죠.
게다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남성이 아닌 여성들의 주도권도 강화된 공동체였고요.
사회적인 제도들, 즉 노예나 종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는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유대교의 관습에 따르면 지도자는 이미 어려서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었다는 의미고, 신분상이나 계층을 뛰어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초대교회의 수평적 지도력은 혁명에 가까운 것이죠.
이런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변혁이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죠.
그러나 초대교회의 긍정적인 변혁 내면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바울이 어제와 오늘 말하는 행간에는 그런 문제들이 배어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잘 바라보지 않는 초대교회의 이면일지도 모르는데요.
그것은 신분을 뛰어넘는 영적 자격을 얻은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점입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이단과 잘못된 지도력이 많았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사랑받고, 환호받고, 박수받는 이유가 자신들의 잘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죠.
과연 기독교 공동체에서 내가 사랑받고, 존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생명, 내 인격, 내 처지가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모습 이대로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그저 나 때문일까요?
그것이 그저 나 잘 나서일까요?
심지어 내 생명이 가치있고, 내 인격이 가치있어서 일까요?
혹시 내 생명이 가치있는 이유는 그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 때문은 아닐까요?
혹시 내 인격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 인격을 사용하시는 그분 때문은 아닐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인에게 잘하라고 권면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는 종의 신분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공동체에서 존중받고, 높임을 받았어요.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울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삶의 자리에서 주인에게 반항하고, 주인을 업신여긴 종들이 생겨났던 것이죠.
그러다 쫓겨나고 처벌을 받는 이들도 있었을 거예요.
또한 이런 모습들 때문에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한 저항도 많았겠죠?
말씀을 읽다보면 초대교회의 오류들이 느껴지는데요.
초대교회라고 다 좋은 영성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행동과 메시지들도 많았어요.
마치 자신이 잘나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중받는 줄 아는 잘못된 영성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치있는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중받는 이유는 우리 안에 주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이죠.
우리 안에 주님이 없고, 우리 생각에 주님이 없는데 존중받으려고 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우리 행동에 주님이 없고, 우리 꿈에 주님이 없는데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죠.
우리에게 존중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권리주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죠.
우리는 주님을 등에 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고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등의 주님을 보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주장, 나의 호통에 세상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등에 계신 주님의 정의와 공의에 세상이 떠는 거예요.
내 성격으로 세상을 주무르려고 하지 마세요.
내 안에 품은 주님의 생각으로 세상을 다스리셔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세요.
종에서 주인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종임에도 주인처럼 여유있고, 노예임에도 주인처럼 너른 마음으로 주인을 대하는 것이 목표여야 해요.
그 속에 주님의 일하심이 임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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