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4:12-16 세상이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은 조금씩, 그러나 지속적으로, 하루하루 진보하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이 다릅니다.
서양의 사고는 시간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개념으로 인식합니다.
이것을 보통 '직선사관'이라고 말하죠.
반면 동양의 사고는 순환을 강조합니다.
윤회라고도 불리는 이 개념은 시간이 반복되고 돈다고 해서 '순환사관'이라고들 하죠.
당연히 기독교도 직선사관의 개념에서 시간을 보는데요.
시작인 창조의 때가 있다면 마지막인 종말의 때도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상의 어딘가에 놓여있죠.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존재죠.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바울의 권면이 담겨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권면들이죠.
모든 이들의 본이 되라는 말부터 끊임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은사대로 살라는 주문을 합니다.
사실 이같은 주문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받습니다.
늘 받지만 늘 실패하는 주문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주문들에서 다른 의미를 하나 발견합니다.
위의 각종 주문들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은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을 "잘" 해낼 것 같지 않기 때문이죠.
특별히 이웃과 사람들을 향한 사역들, 가르치고, 권면하고, 은사대로 사는 것에 잘 해낼 자신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본이 되는 말은 훌륭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말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때론 떨어지는 자존감 때문에 '나같은 것이 뭘~'을 생각에 달고 살기도 하죠.
그런데 이와 같은 일들을 해야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훌륭한 사역을 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일까?
내가 놀라운 일들을 해서 이 땅을 뒤집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하면 더욱 쪼그라드는 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일이 아니라 다른 이유라면 어떨까요?
가령, 그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 일이 아니라 그저 나를 지키는 일이라면요?
마치 하루 세끼 밥을 먹듯 최소한의 내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면요?
그렇다면 그리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리 거창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울은 15절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언급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이를 진보라고 말했는데요.
진보란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시간이 가듯이 느리지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조금씩이지만, 그러나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이죠.
직선의 사관에서는 가장 큰 장애가 바로 멈추는 것입니다.
멈춘다는 것은 곧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이죠.
오늘도 우리가 묵상을 하는 이유는 조금씩 전진하려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은 훌륭하거나 위대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조금씩, 작은 한걸음씩, 그러나 지속적으로, 멈추지 않고, 하루하루 진보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작은 진보를 이루어내는 여러분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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