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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빌립보서묵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누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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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묵상06 | 2:5~8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누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아마도 2:5~8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네오]

본래 생각이나, 정신, 기질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말하는 경향성에 대한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NIV성경은 attitude, 즉 태도나 사고방식과 같이 번역하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의 태도나 생각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면

제자인 우리도 그 생각과 방향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그 분의 태도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이 갖는 무게감에 비해

우리들에게는 훨씬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집니다.

권리문제 때문이죠.

 

우리들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을 극히 싫어합니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이 삶의 진보로 생각하죠.

심지어 예수를 믿는 이유도 권리를 얻기 위해서 아닐까요?

천국을 보장받을 권리,

복이나 은혜를 받을 권리,

건강이나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를 원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리스도의 태도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당연히 누릴 권리조차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본질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누려야할 권리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써

이 땅의 피조물들을 지배하는 권리십니다.

하늘의 보좌를 누릴 권리시죠.

그런데 그는 그 권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지배자도, 정복자도, 창조주로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권리가 아닌 이 땅의 모습으로 오셨죠.

게다가 그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말입니다.

당시 주인을 대신해서 태형을 받고, 모욕을 받으며,

대신 해서 죽기까지 하는 것은 노예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노예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그분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요?

 

세상의 풍조는 언제나 권리추구에 시선을 둡니다.

식당엘 가면 당연히 서비스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요.

돈을 냈다면 당연히 존중받아야할 권리가 있고요.

주인이면 당연히 종을 부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죠.

남자의 권리가 있고, 또 여자로써의 권리가 있죠.

언제나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려고 힘쓰죠.

얼마나 권리를 누리고 사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가 깨지면 분노가 일어나고 다툼이 생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권리추구에 힘쓰죠.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인의 마을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예수님의 통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격분했습니다.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야고보와 요한은

격분한 나머지 예수님께 호소합니다.

 

9:54,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꾸짖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꾸짖으실만 하죠?

아무리 자신의 길을 막았더라도

마을을 불태우겠다는 생각을 어찌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꾸짖음이 과연 제자들의 분노가 과해서 하신 꾸짖음을까요?

아니면 그런 분노를 하지 말라는 꾸짖음일까요?

아니, 길을 가는데 자신의 집 앞이라고 길을 막으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마을길을 지나는데 통행세를 내라면 화 안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길이 자신들의 땅입니까?

길은 가라고 있는 것이지 막으라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우레의 아들들이 흥분한 나머지

과한 청을 해서 꾸짖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그 성질 좀 죽여라라는 꾸짖음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에 분노하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분노는 괜찮고 과한 화만 안내면 됩니까?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과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불평할 권리,

남을 향한 비판과 험담을 할 권리가 없기 때문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스승을 판 가룟유다는 모든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죠.

그런데 우리는 가룟유다의 죄과를 잘못 짚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스승을 배신해서 문제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해서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만약 가룟유다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보셔야 합니다.

가룟유다의 문제는 배신이 아닙니다.

그에게 문제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못한데 있습니다.

 

유다는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셈에도 밝고, 사리분별도 빠른 사람이죠.

성품도 믿을만한 사람이었기에 회계도 맡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스승을 배신하고,

돈을 착복까지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에게 있는 똑똑함의 권리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리로 판단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가면 다 망하고, 얻는 게 없는 겁니다.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는 결과가 뻔한 거죠.

그것이 탐욕과 배신을 낳은 것입니다.

문제는 권리포기입니다.

 

여러분은 권리를 내려놓은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아니면 오히려 권리를 더 얻으려고 신앙생활하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마음을 따르십니까?

아니면 이 땅의 마음을 따르십니까?

 

[권리포기]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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