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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로마서묵상

로마서묵상33]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당신을 세상의 틀에 밀어 넣지 않게 하라(롬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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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이 당신을 세상의 틀에 밀어 넣지 않게 하라(롬12:1~2)

 

 

 

 

우리는 지금 정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본문 앞에 놓였다. 로마서12:1~2절이 그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산 제물이 되라고 말한다. 그것이 주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는 이 시대의 풍조를 거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2절)에 나타난 “본받지 말라”의 우리말 표현은 본래 원어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수스케마티조마이’인데 뜻은 ‘틀에 맞추다’는 의미이다. 명사형 ‘SCHEMA'에서 영어의 표현 Scheme이 나왔다. Scheme의 뜻은 ‘계획’, ‘도식’, ‘제도’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의 주물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부어 찍어내는 붕어빵처럼 틀에 찍어내는 것이 ‘수스케마티조’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불편하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바로 복음이 세상의 풍조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우리의 옛사람은 거대한 악령이나 사단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풍조, 세상의 문화를 섬긴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여긴다. 복음이 철학적인 문제를 던질 때는 사람들은 경청한다. 그러나 복음이 ‘세상의 풍조냐? 하나님이냐?’라고 질문할 때는 모두 떠나가 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문화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총성 없는 문화전쟁 한 복판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문화의식화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간접광고들이 널려,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우리는 하루에 3,000번의 광고를 접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이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의 의식은 수많은 문화의식화 사업에 점령당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문화의식화에 노출되어 있을 때 자연적으로 세상의 틀에 맞추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풍조에 따르려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가졌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사고와 가치관, 행동양식들이 틀에 맞게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대로 믿고 살려면 세상의 문화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이 경계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풍조를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 경계심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를 구원한 것은 저 기업이고, 저 돈이고, 저 쌀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유대인들이나 유대지도자들이 다 사단의 종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풍조를 반대하셨기 때문이다. 정작 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단 것은 그들이 따르고 믿는 세상의 풍조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우리도 어느 순간 우리가 따르고 틀에 맞춰진 세상의 풍조와 복음이 부딪칠 때 바로 이 현상이 재발할 것이다. 복음을 소유하면서도 세상의 풍조와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저 철학적으로만 믿는 것이다. 이 복음이 나의 삶에서 내 삶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의 풍조에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 때 우리는 커다란 내면적 영적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반쪽 복음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만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반쪽 복음이다. 분명히 하라.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는 세상의 풍조에 반대하는 예배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주문이면 바울이 우리에게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 했겠는가? 당신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의 풍조들이 당신을 틀에 박힌 존재로 만드는 것을 지금 반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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