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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열왕기상묵상

열왕기상묵상43]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 위로받을 존재가 아니라 징계받을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왕상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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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용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용서를 구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용서를 해야할 대상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용서를 구하는 대상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늘 죄인입니다. 도무지 선한 일을 한 적이 없고, 늘 죄 짓는데는 빨랐으며 내 자신을 교정하는데는 늘 느렸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들 나는 할말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안엔 그분의 위안이나 어떤 영적인 은총도 받을 만한 자격이 조그만치도 없습니다. 나의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고 할찌라도 그분의 위로를 얻을 만한 자격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자격이 있어서 용서함 받은 것이 아니요, 나에게 의로움이 있어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주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분 앞에 나아갈 길은 오직 겸손함 밖에 없습니다.

아합왕 시절에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아합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인가 길한 것을 예언한 적이 없고, 언제나 흉한 것만 예언하곤 합니다."(8절) 그래서 아합은 그를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쓴말들을 싫어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에서는 강한 메시지, 강력한 도전의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은 경고들을 싫어합니다. 대놓고 위로의 말씀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좋은 말씀을 달라고, 축복의 말씀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을 깨뜨리는 복음의 강력한 메시지는 점점 사라지고 그런 교회와 목회자는 점점 터부시 됩니다. 반면에 번역의 신학, 번영의 메시지만이 교회에 판을 칩니다. 그런 교회들이 부흥하고 그런 메시지에 심취한 사람들이 취미삼아 봉사하며, 헌신하며 자신의 것, 자신의 울타리는 강력하게 지킨 채 그리스도인 행세를 합니다.

아합에게는 달콤한 메시지를 전하는 400명의 선지자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왕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에 달콤한 이야기만 하는 이들이 주위에 많았습니다. 우리는 유유상종으로 끼리끼리 만납니다. 그리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좋은 말들을 나누며 삽니다. 그런데 교회에서까지 그런 말들을 요구합니다. 선지자가 있어야할 이유를 망각한 채 말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진정한 삶의 선지자들이 있습니까? 미가야의 독설은 아직 남아있는 하나님의 애정의 증표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놓인 자들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자신을 위로보다 징계받을 자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위로와 은혜와 강복은 그분에 의에서 허락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거론할 것이 못됩니다. 나는 여전히 죄인임을, 위로를 요구하기는 커녕 주신 위로를 냉큼 받기도 민망하고 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죄인임을, 언제나 나는 당신의 경고와 가르침으로 내 영을 깨워야 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갈1: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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