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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33 - 주님이 거하실 방을 내어 드리세요.

누가복음서 2:1~7   그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5월은 5월인가 봅니다. 이틀 지났는데 날이 너무 좋죠? 흐린 듯 맑고 시원한 듯 따스함이 온몸을 감싸네요. 바쁘고 힘겨운 삶 가운데 잠시나마 주님이 주신 향기로운 계절의 포근함을 느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잠시만 내 시간을 내어 맑은 하늘을 보며 감사함을 고백해 보세요. 오늘이 조금 더 여유로워질 줄 믿습니다.

 

어제와 같은 본문으로 다시 한번 묵상을 나눕니다. 어제 우리는 성경 해석 측면의 묵상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내용적인 측면을 묵상해 보죠. 지금 로마는 인구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한다고 기록했는데요. 이는 당시 로마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죠.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갔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게 너무 번거로운 일이죠. 기록에 보면 다른 지역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인구 조사에 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독 성경만 고향에서 인구조사를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이는 유대의 독특한 문화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요셉이 다윗 가문 출신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혈통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장치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사실 요셉의 고향이 베들레헴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베들레헴은 다윗의 성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죠. 그러니까 다윗 가문의 고향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 가문인 요셉이 베들레헴에 간 것이죠. 아마도 요셉은 베들레헴과는 연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묵을 방이 없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죠. 만약 베들레헴이 고향이거나 가족 관계가 있는 곳이라면 묵을 거처 정도는 있었겠죠. 게다가 마리아가 막달에 찬 산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여관을 찾아야 했죠. 

 

이 장면은 어린 시절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주일학교 연극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빈 방 없어요?'라는 제목의 연극을 저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인구 조사를 위해 온 사람들로 여관은 가득 찼겠죠. 그래서일까요?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 한 모퉁이 마구간에서 출산을 합니다. 사실 마구간에서 출산을 한 대목이나 예수께서 말구유에 누인 모습등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에 대한 기록은 누가복음서 밖에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유와 유대 문화의 구유에 대한 차이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제외하고 오늘 본문에서 느끼는 제 감정은 따로 있습니다. 그 감정은 비정함입니다.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다'라고 적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마치 바쁘고 정신없는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간 틈이 없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마리아는 산모죠.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생명이 살고 죽는 문제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가장 순전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자신의 방을 내주지 않죠. 불편했을까요? 내 일이 아니라 괜찮았을까요? 나와 다른 사람이 귀찮았을까요? 그런 비정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똑같은 행동을 하죠. 나와 다른 생각이 불편하다고, 바쁘고 자기 할 일이 많다고, 내 일이 아니라고 주님의 손길을 뿌리칩니다. 그분이 오늘도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그 사랑을 외면하죠. 마치 도와야 할 사람을 외면하는 것처럼 비정함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그분의 겸손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셨던 우리의 비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찬양한다고요?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시고 붙잡으시고 소리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우리의 비정함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님의 선하신 인자하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혈의 피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의 비정함 때문입니다. 

 

오늘 주위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비정함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우리의 눈을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러면 오늘은 조금 더 나은 성장을 이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세요. 그분의 손길에 마음을 여세요. 그 말씀이 들어갈 방, 주님이 거하실 방을 내어드리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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