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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86 - 누군가는 끊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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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20:1~6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라. '내가 모세를 시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지정하여,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그곳으로 피하게 하여라. 그곳은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다. 살인자는 이 성읍들 가운데 한 곳으로 가서, 그 성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설명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를 성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있을 곳을 마련해 주어,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다. 죽은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 뒤쫓아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손에 살인자를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전부터 그의 이웃을 미워한 것이 아니고, 실수로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살인자는 그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 곧 자기가 도망 나왔던 성읍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올해 마지막 금요일이네요. 매일 묵상도 오늘이 올해 마지막이고요.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올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끝자락에 다다랐네요. 올해도 매일 묵상에 최선을 다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해도 우리의 묵상은 우리 영혼 깊은 자리에 씨를 뿌리고 그 씨앗은 자라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영성에 귀한 열매가 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자라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이제 가나안 땅의 분배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리고 20장에 들어서 새로운 제도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죠. 그것은 도피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도피성에 관한 내용은 조금 복잡합니다. 그런데 최대한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제도의 내용보다는 그 속에 숨은 의미에 대해서 묵상을 나눠볼까 합니다. 아마도 몇 차례 묵상이 이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일단 도피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해친 경우에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 같은 곳입니다. 실수라고 해도 살인은 살인인지라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런데 당시 고대 근동의 법 사상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당한 대로 돌려주는 법 상식이 만연했죠. 이것을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이라고 하죠. 그래서 실수이건 고의이건 잘못을 저지르면 그와 똑같은 형벌을 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의가 아닌 실수, 혹은 원하지 않는 일에도 똑같이 처벌되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 거죠. 심지어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으면 이를 끝까지 찾아가서 복수를 해야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피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죠. 그래서 고의성이 없는, 혹은 실수로 원치 않는 살인을 범한 이들에 한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도피성이죠.

 

사실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특이하게 보이지만 오늘날에도 도피성이 있습니다. 그게 감옥이죠. 물론 오늘날의 법 감정이 당시와는 상당히 다른 측면이 있지만 감옥이라는 것이 죽임을 당할 정도의 죄로 볼 수 없다고 해서 교화의 시간을 주는 것처럼 도피성 또한 그저 죽음을 면했다고 즐겁게 사는 그런 곳이 아니라 피해 있는 동안 근신의 시간을 갖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도피성을 굳이 제도화했을까 싶은데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죠. 인간에게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되돌려 주고 싶은 보복의 심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정의라는 개념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보복 심리가 작동하기도 하죠. 이 보복 심리는 작은 마찰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에는 보복이 더 큰 보복을 낳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는 끝도 없이 이어져 가문의 전통이 되기도 하고 전쟁의 역사가 되기도 하죠. 도피성은 그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제도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랑과 은혜의 연은 그리 질기지 않아요. 나눔과 도움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죠. 끊어지는 이유는 허다합니다. 고마워하지 않아서 그만두고, 내 살길 바빠서 멈추고, 해보니 뭐 도움 되는 것도 없어서 흐지부지 되죠. 그런데 미움의 연은 질깁니다. 한번 미워하면 미워할 거리들이 매 순간마다 늘죠. 하는 짓들이 다 마음에 걸리고 웃는 표정조차 싫어지더니 마침내 숨소리 마저 소음처럼 들리기까지 하죠. 아무도 보태주지 않았는데 악은 성장합니다. 

 

그때 누군가 끊어줘야 합니다. 무언가 단절의 계기가 필요하죠. 마음을 돌이키고 새롭게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죠. 미움의 역사를 끊고, 아픔의 과정을 돌이키는 것,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끊어야 하죠. 그 죽음의 역사를 영원한 생명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꾸었듯이 우리도 오늘 내 안에 있는 악한 감정들을 끊어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멈춰야 하죠. 그렇게 끊어야 새로운 감정, 새로운 생각이 시작되니까요.

 

어쩌면 오늘은 낡은 것들을 끊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귀한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새해의 꿈을 위해서, 새로운 길을 위해서 오늘 내 안에 붙어있던 악한 감정과 습관, 부정적인 사고와 인식들을 끊어내는 도피성의 하루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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