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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221 - 너나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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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20:14~22   세바가 모든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로 두루 다니다가, 아벨 지역과 벳마아가 지역과 베림의 온 지역까지 이르렀다. 그곳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의 뒤를 따랐다. 요압을 따르는 군인들은 그곳에 이르러서, 벳마아가의 아벨을 포위하고, 세바를 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성읍을 보면서 둔덕을 쌓으니, 이 둔덕이 바깥 성벽의 높이만큼 솟아올랐다. 요압을 따르는 모든 군인이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부수기 시작하니, 그 성읍에서 슬기로운 여인 하나가 이렇게 외쳤다.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요압 장군께, 이리로 가까이 오시라고, 말씀을 좀 전하여 주십시오!"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그 여인이 "요압 장군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요압이 "그렇소" 하고 대답하니, 그 여인이 요압에게 "이 여종의 말을 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요압이 말하였다. "어서 말하여 보시오." 그 여인이 말하였다. "옛날 속담에도 '물어볼 것이 있으면, 아벨 지역에 가서 물어보아라' 하였고, 또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결하였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평화롭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서 어머니와 같은 성읍을 하나 멸망시키려고 애쓰십니다. 왜 주님께서 주신 유산을 삼키려고 하십니까?" 요압이 대답하였다. "나는 절대로 그러는 것이 아니오. 정말로 그렇지가 않소. 나는 삼키거나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오. 그 일이 그런 것이 아니오. 사실은 에브라임 산간지방 출신인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는 사람이, 다윗 왕에게 반기를 들어서 반란을 일으켰소. 여러분이 그 사람만 내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물러가겠소." 그 여인이 요압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머리를 곧 성벽 너머로 장군께 던져 드리겠소." 그런 다음에, 그 여인이 온 주민에게 돌아가서 슬기로운 말로 설득시키니, 그들이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잘라서, 요압에게 던져 주었다. 요압이 나팔을 부니, 모든 군인이 그 성읍에서 떠나, 저마다 자기 집으로 흩어져서 돌아갔다. 요압은 왕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아마사를 제친 요압은 반란군 세바를 쫓습니다. 그러고 보니 왕의 명령은 아비새가 받았는데 지금 주인공은 요압이 되어 있네요. 형제는 용감했던 것일까요?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있죠. 요압이 그런 성품을 가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 대목입니다. 아무튼 요압은 세바를 찾아낸 것 같아요. 일단 세바가 쫓겨 포위된 것으로 보아 그의 진압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능력은 참 출중하네요. 그가 숨은 곳은 벳마아가의 아벨이라고 하는데요. 이곳은 예루살렘과는 먼 갈릴리 호수 위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아마도 쫓기다 그곳까지 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압살롬은 남쪽 헤브론에서, 세바는 북쪽 아벨에서, 아주 전국을 반란의 흔적으로 뒤집어 놓았네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곳 아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벨로 진격한 요압 군은 세바를 잡기 위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자 한 여인이 요압 앞에 나타나죠. 아마도 그녀는 아벨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읍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요압에게 간청하죠. 그리고 대화로 이 전쟁을 막습니다.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요압도 아벨도 모두 승리자가 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저는 하나의 지혜를 배우는데요. 그것은 아벨을 대표해 나온 여인의 '말'입니다. 이미 요압은 승세를 굳힌 것 같죠. 그러니까 칼자루는 요압이 쥔 셈이죠. 그에 비해 그의 앞에 나타나 가로막는 이는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한들 그 기세 등등한 군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말 한번 잘못 붙였다가는 기분만 더 상하게 만들지도 모르죠. 사실 우리들은 말을 잘하기가 쉽지 않아요. 대화를 하자는 말은 많이 하는데, 대화가 오히려 감정을 더 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 십상입니다. 말만 하면 더 관계가 악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경우도 허다하죠. 특별히 이렇게 서로의 입장이 다르거나 혹은 서로가 확고한 목적으로 확신을 갖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죠. 서로 자기 입장만 확인하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경우가 훨씬 많죠. 그런데 요압과 이 여인의 대화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여인의 대화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여인은 먼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벨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말하죠. 이것을 소위 아이메시지(I-message)라고 하죠. 상대방을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먼저 나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 아이메시지, 즉 나 전달법입니다. 반면 우리가 익숙한 것은 '너 전달법(you-massage)죠. 그러니까 주체가 상대방이 되어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죠. 아주 흔한 예를 들면 "너 그러지 마!" 이것이 상대방을 주어로 하는 전달법이죠. 우리는 무수히 이런 식의 말을 합니다.

 

'너 왜 그래?' '또 그런다' '그것도 못하니?'

 

우리는 지적질에 탁월한 취미를 가지고 있죠. 마치 내가 다 옳다는 식의 대화가 전부입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죠. 모든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다는 공격적인 언사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화가 되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지적질을 하기도 하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왜곡된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죠. 그렇게 남에게 모든 문제를 떠넘기는 것이 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이죠.

 

오늘 등장하는 여인은 요압에게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내 마음의 표현뿐입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하고 보는 입장마다 다를 수 있어요. 그 상황을 내가 사실이라 부를 수 없어요. 여기에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이해관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관계 속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죠. 용서하고 덮어주는 관계 말이죠. 다만 나의 마음과 감정은 나만이 표현할 수 있기에 그것이 내 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감정인지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화는 남을 가르치거나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그 지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요압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처지와 입장이 어떤지를 전달하죠. 이에 요압의 입장도 듣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해결책도 찾죠.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안 가르쳐주면 모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마세요. 누구나 스스로 훌륭히 배워나갑니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죠. 내가 누구의 가르침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렇게 가르쳐준 선생이 있었다면 한번 떠올려보세요. 영적인 스승조차 두려고 하지 않는 우리인데 가르친다고 배웁니까? 지혜는 가르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만 잘하면 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잘 살면 됩니다. 좋은 부모는 잘 가르치는 부모가 아니라 스스로 잘 사는 부모일 뿐이에요. 그렇게 자기의 인생, 자기의 스토리를 써 내려가면 그것이 메시지가 되고, 그것이 가르침이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너나 잘하세요'.

 

많이 추워졌습니다. 연말이라 바쁘기도 하시죠? 추우면 추운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감사하며 사는 오늘이 되길 빕니다. 건강에 더욱 유의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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