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9:40b~43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따라서, 요단 강을 건너갔다. 그런데 갑자기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에게 몰려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우리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이 우리와 의논도 없이, 임금님을 몰래 빼돌려 임금님과 임금님의 가족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를 모시고 건넜습니까?" 그러자 온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임금님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런 일로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임금님께 조금이라도 얻어먹은 것이 있느냐? 임금님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주신 것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아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유다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께 요구할 권리가 너희보다 열 갑절이나 더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우리를 무시하였느냐? 높으신 임금님을 우리가 다시 모셔와야 되겠다고 맨 먼저 말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니었느냐?" 그래도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다.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왕으로 복귀를 하는 셈이죠. 참 우여곡절이 많은 귀환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곡절이 있네요.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의 귀환 순간에도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로 일컬어지는 부류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와 베냐민이 속한 집단입니다. 나중에 남유다 왕국을 이루는 그룹이죠. 반면 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0개 지파들이 모인 그룹입니다. 이들이 후에 북이스라엘을 이루죠. 이미 다윗의 복귀를 놓고도 이들 두 그룹은 분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윗의 복귀를 서두르지만 유다는 고민을 하죠. 아무래도 자신들이 반란의 주동자들이었기 때문일 테죠. 그러다 다윗의 탕평책을 보면서 다윗의 귀환을 기정사실화 하는데요. 이번에는 유다가 서둘러 다윗을 모셔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그룹에게는 다윗의 귀환 일정을 통보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주로 유다 백성들만 모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귀환 행렬에 동참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귀환하는 다윗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생각이었을 테죠. 게다가 이런 기회는 자신들만의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속셈도 읽힙니다. 어찌 보면 참 유치하죠? 방금 전까지는 다윗 귀환의 방해자였는데요. 이제는 갑자기 수호자가 되어서 자신들만이 다윗 편인양 우쭐대고 있는 모습이 참 역겨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치한 싸움은 끝도 없습니다. 서로가 자신이 더 다윗에게 가깝다고 우기죠. 유다는 다윗이 자신들 집안 출신임을 거론합니다. 그 말 또한 사실이지만 조금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집안 출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반란을 일으켰던 그들입니다. 가까워서 더 미워하고, 자기편이어서 더 싫어하는 그들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자랑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자신들이 지파 중에 10 지파나 속해있으니 권리도 10배는 더 있다고 주장하죠. 이 또한 그렇습니다. 마치 사람이 많고 다수의 의견이면 그것이 전부 옳다는 주장인 셈이죠. 참 볼썽사납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같죠? 예수님의 12 제자들도 툭하면 이런 대화를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가? 누가 더 높은 자인가를 놓고 언쟁을 벌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슨 득을 보기 위한 싸움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언가 득을 보기 위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체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득이고 선물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삽니다. 그것이 진리처럼 여겨져 있죠.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를 위해 쌓아 둔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오늘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바로 오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일 뿐이죠. 그 오늘을 살지 않으면 내일도 없어요. 그 오늘이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면 내일의 만족도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기 위해 오늘 하는 행동은 가식일 뿐이죠. 오늘 하는 행동이 기뻐야 하고, 진실되야 내일도 진실된 겁니다. 결과는 그렇게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므비보셋이, 바르시래가 보여주었습니다. 내일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진심이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진심으로 살 수는 없을까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의 현실이 개였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미래 또한 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오늘 하루의 삶이 내일이 되고, 그날들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그리고 내 삶이 되죠. 오늘을 의미 있게 살지 못하는데 내일 의미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오늘을 행복하기 만들지 못하면 내일의 행복 또한 없죠. 그래서 오늘에 진심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을 모신다면 그 일에 진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직장에서 일한다면 그 일에 진심이어야 해요. 그 진심이 미래를 만들 뿐, 우리의 계략이 미래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우리의 꿈이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먼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거나 행복을 꿈꾸지 마시고 오늘 내가 훌륭하게 살고 오늘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꿈을 꾸면 어떨까 싶어요. 그 오늘이 언젠가 내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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