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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이사야서묵상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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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9-17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접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분열된 이스라엘의 남유다의 대표적인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엄혹한 현실의 시기였는데요.
분열국가 중 하나였던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한 시기였고, 남유다 또한 팽창하는 외부 세력의 변화에 풍전등화 같은 위기의 때였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닥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영적인 타락을 보였습니다.
우상숭배나 자기 욕심에 빠져 권력을 휘두르기 일쑤였죠.
어디 문제가 지도자뿐이었겠습니까?
백성들 또한 욕망과 욕정에 사로잡혀 자기 뜻대로 살았습니다.
이기주의에 공동체 정신은 깨어지고, 욕망으로 인한 영적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늑대는 양 떼들이 모여있는 무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골짜기를 거니는 양떼를 향해 울음소리만 들려줄 뿐이죠.
그러나 공격의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그 늑대의 울음소리를 듣고 공포에 질리는 양이 나타납니다.
그 양은 공포감에 목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늑대가 몰려와 자신을 공격할 때 목자가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꼬리를 뭅니다.
그 의심은 더욱 자신의 목을 조여와 공포심은 극대화되죠.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라 선택하는 것은,
이 무리를 떠나 자신만의 살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길을 자신이 선택해 달아나는 것이죠.
문제는 늑대가 노리는 목표물이 바로 그 무리를 떠나 달아나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내면에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외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목적의식이 사라지고, 사명감을 잃으면 귀가 얇아집니다.
영적인 감각이 죽고, 의심이 생기면 자신만이 홀로 남습니다.
나를 도울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여기죠.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 가장 두려운 것은 외부의 세력이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할 것 같고, 누군가가 나를 넘어뜨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오죠.
내면이 단단하지 못하니까 생기는 신기루 같은 공포입니다.
오히려 그 공포는 실제로 외부의 공격을 강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공포심에 휩싸이면 이성이 마비됩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죠.
아무리 강한 권력도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강한 앗시리아나 바벨론이라도 힘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말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안의 공포심은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아 보이죠.

우리의 인생이 피는 꽃 같아도 금세 시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꽃 같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인생이죠.
그러나 공포심에 사로잡히면 그 간단한 영적 원리도 잊어버립니다.
꽃을 피워야 성공한 것 같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삶을 선택하려고 하죠.
말씀을 따르는 삶은 손해 보는 삶이 되고,
세상을 따르는 삶은 손에 잡히는 삶처럼 여겨집니다.
공포심은 우리를 그렇게 옥죕니다.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놀라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접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글을 써봐야 하죠.
훌륭한 보석 감정사가 되려면 보석을 많이 만져보아야 합니다.
위조지폐를 감별해 내는 위폐감별사가 있습니다.
그가 위폐를 잘 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진짜 화폐를 많이 만져보는 일입니다.
진짜 화폐를 알아야 가짜를 구별하니까요.

가짜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진짜를 알아야 하듯
우리가 공포심을 떨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이죠.
그는 목자와 같아서 그의 양 떼를 떠나지 않고 돌보십니다.
그는 공평하셔서 어떤 것으로도 치우치지 않으시며
그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셔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는 우리 위에 계시며, 그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입니다.
그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내어놓으신 분이죠.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무엇이든 하십니다.
어떤 권세도 그를 이길 수 없으며,
어떤 권력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완전히 도울 분은 그분밖에 없죠.
여러분의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은 나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공포심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의 의지로 되지 않아요.
나의 내면이 온전해질 방법은 나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아는 것이에요.
오늘도 주님을 알아가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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