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데서 긍휼을 찾지 말라. 긍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어느 나라의 왕궁에 고귀한 나무 하나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이 나무를 너무나도 아꼈기에 그 나무를 상하게 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이미 법으로 제정해 놓을 정도였다. 그 왕에게는 개구쟁이 왕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늘 호기심이 많고, 장난끼가 넘쳐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개구쟁이 왕자는 늘 그 나무에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느 날 나라의 잔치가 열려 모든 신하들이 왕궁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 틈을 타 왕자는 꿈에도 그리던 그 나무에 올라갈 마음을 가졌다.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왕자는 조심스레 그 나무위로 올라갔다. 능숙한 솜씨로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며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높은 나무위에서 쐬는 바람과 내려다보는 광경은 너무도 황홀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즐기던 왕자는 이제 나무에서 내려가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나무에서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마지막으로 밟은 가지가 그만 뚝 하고 부러져 버렸다. 땅에 굴러 떨어진 왕자는 자신의 아픔보다 훨씬 강한 공포가 몰려왔다. 나무가 상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구르던 왕자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왕자는 결심했다. 모른 척하고 도망가기로...
왕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불안과 공포에 하루를 보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왕자에게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제야 조금씩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못했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는 속으로 계속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같이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궁에서 일하는 하인이었다. 깨우든 말든 왕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잠을 깨우던 하인의 마지막 소리에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저는 며칠 전 왕자님이 무슨 짓을 하셨는지 다 아는데...”
왕자는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하인을 붙잡고 애걸을 했다.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줘... 특히 아빠에게는 절대, 절대 말하지 말아줘... 내가 뭐든지 다할게, 응?”
심지어는 그 하인 앞에 왕자는 무릎까지 꿇었다. 하인은 아까보다 더 굳은 태도로 왕자에게 되물었다.
“내가 입을 다물면 뭐든지 다하신다고요?”
“응, 뭐든지 다 할께... 제발, 용서해줘”
“음... 그럼, 나대신 이 빗자루로 여기 마당을 좀 청소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그 까짓것 청소가 대수야? 알았어...”
왕자는 생전 해보지 않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하인은 왕자를 깨웠다. 아무 말 못하고 왕자는 또 마당을 쓸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싫은 척을 하면 그 하인은 “나는 왕자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는데...”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오금이 저려와 왕자는 싫던 일도 하게 되었다. 그 하인의 요구는 청소만이 아니었다. 이후로는 빨래며, 풀을 뜯는 일에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는 일까지 점점 강도가 세어졌지만 왕자는 아무 말도 대응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한 일이 밝혀지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인의 말을 따르는 길이 자신이 죽지 않는 일이고, 그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다.
어느 날 왕자는 자신이 해야 할 공부와 왕위계승 수업도 하지 못하고 하인의 일이나 하면서 매일매일을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에게 벌을 받는 편이 낫겠어.”
그는 무서웠지만, 그리고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하실지, 또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실지, 여러 염려와 걱정이 앞섰지만 그보다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초라하고 한심해서 그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왕자의 신분도, 아들의 신분도 다 잃더라도 이 한심하고 불안한 삶을 청산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갔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셨다. 왕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백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가와 꼭 안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단다. 그 나무가 아무리 귀한들 내 아들인 너보다 귀하겠느냐?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단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오히려 아빠는 이렇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네가 자랑스럽고 고맙구나!”
왕자는 이미 아버지가 알고 계셨고,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들이기에 더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을 정작 아들인 자신은 까맣게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미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일에 나는 전전긍긍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는 말인가? 아버지에게 긍휼을 구할 일을 나는 하인에게 긍휼을 구하는 미련한 짓을 해왔단 말인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기쁜 관계의 회복을 가진 왕자는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주 익숙한 소리가 또 들렸다.
“왕자님, 마당 청소하셔야죠?”
하인의 소리였다. 왕자는 여유롭게 방문을 열며 하인에게 말했다.
“싫은데?”
“네? 아.... 저는 왕자님이 오래전 하신 일을, 그 어마어마한 일을 다 알고 있는데...”
“그래서?”
왕자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네? 아... 저.... 그 일을 아버지 임금님께 가서 말할까요? 큰일 나실 텐데...”
“말해.... 가서 말씀드려...”
왕자는 이렇게 말하며 근엄하게 일어나 외쳤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내 쫓아라.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죄 때문에 생긴 불안과 염려를 위해 죄에 긍휼을 구한다. 처벌과 불이익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율법에 긍휼을 구한다. 그러나 죄에 긍휼을 구하든, 율법에 긍휼을 구하든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데서 긍휼을 찾지 말라. 긍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긍휼에서 용서와 은혜가 나온다. 하나님의 긍휼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에게 새롭고 산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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