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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2 - 결과를 단정 짓지 마세요.

누가복음서 1:24~25   그 뒤에 얼마 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제 완연한 봄날이죠? 어제는 4월의 푸르름이 한껏 피어오르는 것 같더라고요. 추운 겨울을 지나 생동하는 봄이 오듯이 우리의 깊은 골이 저 높은 산을 향하는 기회였음을 감사하는 따스한 마음 가득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

 

사가랴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예언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 동안 숨어 살았다고 하죠?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숨어 살았다는 것은 알려주죠. 그렇다면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예측이 가능하죠.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임신한 것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죠. 임신에는 기쁨과 부끄러움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이 동전의 앞뒤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죠. 다만 떳떳하다고 할까요? 온전하고 건강한 마음일 때 우리는 부끄러움이 아닌 기쁨으로 그 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엘리사벳은 부끄러울 것이 없기에 부끄러움이 숨어 사는 동기는 아니었을 것 같죠? 그렇다면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자발적 요인일 수도 있겠죠. 일부러 몸을 숨겼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나이가 들어 한 임신이니만큼 몸을 잘 보호할 필요도 있었을 거예요. 태교를 위해서 세상과의 단절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중에 제가 가장 많이 드는 예측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믿음체계를 재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오늘 본문 25절에서 한 독백에서 찾을 수 있죠.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셔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내 부끄러움을 없이해 주시던 날에 나에게 이런 일을 베풀어 주셨다."

 

여기서도 부끄러움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죠. 이 부끄러움이란 여자로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사회적인 풍토가 그랬습니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은 저주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남편이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충만해야 할 가정에 아이가 없으니 더욱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겠죠. 

 

그런데 저는 그보다 다른 부끄러움이 떠오릅니다. 이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엘리사벳이 부끄러워한 것은 어쩌면 남들의 시선에 따른 부끄러움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스스로 '나는 안 돼', '나는 틀렸어' '나이가 많은 내가 어떻게 임신?' 이런 생각과 믿음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늘 그렇지 않습니까? 알량한 지식으로 판단하고 단정적인 결론에 내리기를 반복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그랬던 나에게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으니 이전의 생각들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결과를 단정 짓지 마세요. 하나님은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 나라고 못합니까? 왜 나라고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왜 나라고 지난 아픔과 슬픔이 기쁨과 감사의 마중물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딨어요? 

 

나의 수치는 나의 영광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의 고생은 축복의 시작이 될지도 몰라요. 나의 부끄러움은 면류관이 되고, 나의 약함은 자랑이 되고 나의 실패는 간증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처지를 저주하지 마세요. 오히려 감사하고 기대하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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