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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서묵상 124 - 망함도 축복입니다. 예레미야 52: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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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예레미야의 마지막 묵상입니다. 오랫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읽는 것이 어지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낯선 문화와 역사 배경 속에서 반복되는 일들이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고요. 특별히 예레미야처럼 심판의 메시지는 더욱 읽기조차 민망하고 꺼려질 정도로 우울감을 주기도 하죠. 어쩌면 어떤 묵상을 그동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서의 깊은 은혜가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줄 믿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메시지가 내 마음과 영혼 가운데 새겨져, 순간순간 아름다운 지혜로 되살아날 것입니다.

오늘은 최종적으로 남유다가 완전히 문을 닫습니다. 예루살렘이 정복되고,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몸과 정신 모두 망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삶의 터전까지 잃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죠. 본문은 남유다가 얼마나 처절하게 유린당하는지를 건조하게 적고 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각종 문화유산들이 유출됩니다. 그동안 힘 있다고 여겼던 유다의 지도자들은 체포되고, 노예로 끌려가죠. 그 숫자가 얼마인지도 기록할 정도로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이것이 남 이야기처럼 들려서 그런지, 아니면 수없이 예고를 들어서 그런지 큰 감흥 없이 멸망의 현장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느낍니다. 실제로는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이었을까요?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가족공동체가 파괴되고,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공포가 무겁게 억누르는 현장이 바로 그 장소였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여호야긴의 이야기인데요. 여호야긴은 시드기야가 왕이 되기 직전의 왕으로, 약 3개월 정도 군림하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온 인물이죠. 그가 37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 복권되는 내용입니다. 신기하게도 예레미야서는 그가 죄수복을 벗고, 남은 생애를 바빌로니아 왕과 같은 식탁에서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로로 끌려와 노예처럼 살던 여호야긴이 37년 만에 복권이 되어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는 의미죠. 왜 이 내용이 예레미야의 마지막일까요? 여호야긴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그보다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은 회복이 정답임을 알려주시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손을 들기 전까지는 나의 고집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고 믿을 것이 있으면 절대 항복하지 않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전까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절망의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쩌면 나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망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건강을 잃고 손 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그제야 건강을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되고, 모든 기회가 막히고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에 이르러야 우리는 하나님을 찾죠. 어중간한 곳에서 우리가 회개라는 경우는 없습니다. 바닥을 칠 때까지 우리의 아집과 교만은 수그러들지 않죠. 어쩌면 망하는 것이 축복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파괴되어야 새로운 것이 지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망함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입니다.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우리의 시작은 더 깔끔하고 새로울 것입니다. 망함도 축복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선포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부수고 깨지고 망가지고 파괴되는 그 고통의 시간 너머에 새롭게 지어질 새로운 나를 꿈꾸세요. 잘 망해야 합니다. 잘 무너져야 합니다. 완전히 바닥을 쳐야 합니다. 그 바닥이 우리의 새로운 출발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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