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언자 하나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거짓 선지자가 등장하는데요. 그가 하나냐입니다. 그는 예레미야와는 정반대의 말을 선포합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벗겨줄 것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선포한 것이죠. 얼마나 그럴듯했는지 예레미야도 깜박 속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책망이 아닌 격려요, 어려움이 아닌 편안함을 선포하는 것이니까요. 그와 비례해서 예레미야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높아졌을 것입니다.
예언자 하나냐의 말이 거짓임은 오늘 본문 후반절에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문제는 왜 하나냐가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점이겠죠. 간혹 지도자들에게 유혹들이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싶은 욕망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을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 대중들이 원하는 방향을 설정해서 자신의 길을 정하기도 하죠. 마치 대중의 트렌드나 니즈를 정확히 꿰뚫고 장사를 하는 장사꾼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대중들은 그런 지도자들에게 환호를 하죠.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예언자라는 권위로 맞장구 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하나냐의 다른 모습이 묵상이 됩니다. 제가 목회자이기 때문일까요? 하나냐가 처음부터 그렇게 거짓의 예언자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단서를 성경에서 찾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냐는 인정받는 예언자였던 것 같아요. 그를 소개할 때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가 족보 있는 예언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비록 거짓 선포일지라도 오늘 그의 선포하는 자리에는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가 인정받는 예언자가 아니라면 그런 자리에 서기 힘들겠죠.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예언자의 자리를 지키며 살았던 사람일 테죠. 유추이지만 저는 하나냐가 처음부터 거짓의 예언자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시대가 문제예요. 사람들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적대시하게 되었겠죠. 하나냐에게도 그랬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그나마 버텼겠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힘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고 하잖아요. 점차 투쟁보다는 안정을 찾고, 모험보다는 편안함을 찾게 되죠.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 내가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목회자에게 유혹이 그런 것이에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보다 이제 편안히 대중들과 지내고 싶은 마음들이 들기 시작하죠. 목회자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편안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도 편안하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편안을 목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단지 편안과 안정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에게 편안이 목적이 되어 버리죠. 그러면 하나냐처럼 편안을 위해 거짓을 선포하는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만 기억하세요. 우리는 편안한 삶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명을 위해 편안함이 있고, 그 사명을 위해 위로와 격려가 있을 뿐입니다. 어제 예배를 여는 찬양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의 편안함과 안정은 주를 향해 아끼지 않고,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주시는 애프터서비스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삶의 이유, 삶의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주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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