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에 대한 반응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설교를 싫어하는 무리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 당시와 너무나 흡사하죠? 예수님 당시에도 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획책했습니다. 가룟 유다를 매수하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이르도록 했죠. 예레미야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일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편을 들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옛 선지자들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그의 말이 아프지만 들어야 한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죽일 일이 아니라 살려야 하고, 버릴 일이 아니라 세워줘야 한다고 강조하죠. 그들은 과거의 선지자들을 떠올립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우리야(*다윗시대 우리야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와 거의 동시대 선지자입니다.)선지자의 예를 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예레미야는 살 수 있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자들이 더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보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을 더 선포해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더 싫어하고 있는 것이 어째 등골이 오싹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어떤가 싶어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각을 믿고 따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좋아하는지 말이죠. 다림교육을 하면서 일반 주민들을 만날 기회들이 많습니다. 초창기부터 다림교육에 참여한 학부모 중에는 이미 교회를 다닌 분들이 소수였습니다. 2/3가량은 믿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매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꿈꾸고 생각을 바꿔나가는 일이 무척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 제 마음에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일반 부모님들에게서 오히려 강한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목사의 말을 신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어요.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을 옮겨 선포할 때는 그 말 그대로 믿어주었습니다. 반면 놀라운 것은 이미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아는 분들에게서는 그 반대였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 마치 다 안다는 듯 무관심한 모습을 보았어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말씀 앞에서 여전히 자기만 있고, 아무리 권면해도 듣지 않는 것은 몇 안 되는 그리스도인들이었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이를 두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 믿음이 없구나!"
이 말은 멀리 남에게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저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니까요. 많은 일에 대해 기도하고 무릎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뢰하고 믿어요. 그러나 닥친 일들 앞에서 가장 많이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은 저입니다. 이번 교회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계획을 수립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길을 여심을 보여주셨지만 그렇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끝까지 믿지 못하고, 완전한 결과가 주어질 때까지 확신하지 못했던 건 저였습니다. 어쩌면 믿는 우리들이 가장 믿음이 없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모르는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앞에는 서지만 오히려 듣기 싫은 말씀에는 저주를 퍼붓고 미워하는 마음을 키우는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처럼 되지 맙시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되지 맙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겉과 속이 다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맙시다. 오늘 이 아침에 한번 자신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런 믿음 없는 그리스도인은 아닌가?
말씀이 아프다는 것은 내 영적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영적 변혁은 시작됩니다. 말씀에 아파야 합니다. 매일 아침 아파야 합니다. 그 아픔이 나를 지킬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아픔이 나를 교만하지 않고 늘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 가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아파하는 여러분 안에 주님의 충만한 은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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