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3] 속지 마십시오.
야고보서1:12~18,
12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13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아버지께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
18 그는 뜻을 정하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를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1.
오늘은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이다.
2.
오래전에 감동적으로 본 영화가 있다.
픽스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가 그 영화다.
픽스사는 애플사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가 세운 애니메이션 회사다.
토이스토리라는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잇단 성공에 힘입어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계기를 만든 회사이기도 하다.
3.
[라따뚜이]는 프랑스 요리사의 이야기를 담은 단순한 스토리의 영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유명 프랑스 식당인 구스토 식당이다.
이 식당의 설립자인 셰프 오귀스티 구스토는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책을 쓴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구스토 셰프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대신 다른 주방장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인이 된 이유가 서글프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로 명성을 날리던 구스토 셰프는 늘 식당 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와 대척점에 서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음식 비평가인 [안톤 이고]다.
안톤 이고는 구스토의 “모든 사람이 요리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를 해왔다.
어느날 안톤 이고는 구스토 식당에 대해 최고점을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구스토 식당은 2류 식당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에 낙심한 구스토 셰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4.
내가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구스토 셰프가 사실은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10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베르나르 르와조]다.
5.
프랑스에는 매년 식당의 평점을 매기는 저명한 잡지가 있다.
[가이드 미쉐린]이다.
미쉐린은 음식과 관련된 회사가 아니라 자동차 타이어 만드는 회사다.
그런 회사에서 식당 평점을 매기는 잡지를 만드는 것도 희안한 일이지만 그 잡지가 또 그 분야에서 가장 저명하다는 것도 신기하다.
아무튼 그 잡지에서 베르나르 르와조 식당은 매년 최고 평점인 별 3개를 받았다.
그것도 자그만치 27년간이나 말이다.
한 세대를 풍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03년에 이 식당은 별 1개를 받는다.
그리고 그 해 베르나르 르와조는 자신의 엽총으로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당대 프랑스는 물론 한국에도 보도가 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6.
베르나르 르와조가 자살한 이유를 알겠는가?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실감, 이것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는 최고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27년간...
숨질 당시 그의 나이가 52인걸 감안하면 그는 25살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인간의 육체는 세월이 흐르면 쇠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한평생을 정상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르와조는 최고의 요리사라는 자리를 놓치는 순간 모든 것을 절망했다.
7.
많은 사람들이 르와조를 최고의 요리사라고 칭송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예술로는 최고였을지 모르나 요리사로는 최고라 할 수 없다 본다.
왜냐하면 요리사라는 것이 본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 직업은 자신이 최고임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음식을 제공하는 자리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 등급이 떨어졌다하더라도 그가 만드는 음식은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할 충분한 실력과 경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요리사라는 자리를 자신을 위한 자리로만 여겼을 뿐이다.
8.
우리는 2015년 2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자”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로, 제자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 땅의 흐름 속에서 그래도 죽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서 나에게 주께서 하신 일을 선포해야 한다.
지난 2주간, 그렇게 죽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삶의 방식을 전했다.
수많은 공격 속에서도 1.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
삶의 가치관을 왜곡시키는 높아짐을 쫓는 흐름 속에서도 2.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오늘은 “속지 말라”는 주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
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땅의 흐름은 우리를 속인다.
그 첫 번째 속임은 “자신의 재능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9.
오늘 본문 12절을 보라.
12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고 쓰인 헬라어는 [페이라스모스]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금식하셨던 광야에서도 나온다.
막1: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때, 시험이라는 단어가 [페이라조]다.
명사로 쓰일 때는 [페이라스모스]이고, 동사로 쓰일 때는 [페이라조]로 같은 단어다.
10.
그런데 예수님이 사탄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인줄 아는가?
마4:3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셨기 때문에 배가 고프셨다.
물론 돌을 빵으로 바꾸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너의 재능을 너를 위해 쓰라”는 메시지다.
11.
우리는 이런 인식들을 강요받는다.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다.”
“내가 가진 재능은 너를 위해서 써야 한다.”
“내 힘으로 모으고 쌓은 것은 내 것이다.”
12.
프랑스의 유명 셰프 르와조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요리사는 자신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을 즐기고 먹는 자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13.
우리 몸의 지체들은 각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오른 손등이 간지러우면 왼손이 긁어주어야만 한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과 발이 이뤄주어야 한다.
서로를 위해서 있는 것이 지체다.
14.
가장 기본 되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바로 “내 재능은 남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재능을 나를 위해 사용할 때 삶의 문제들이 발생한다.
똑똑한 머리를 나를 위해 사용하면 사기꾼이 되기 십상이다.
지식, 의술, 언변, 글쓰기 등의 재능을 나를 위해 사용하면 돈은 벌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탄이 바라는 제일의 목표다.
왜냐하면 거기서부터 올무에 묶이기 때문이다.
15.
더 나아가 그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그분의 영광이 아닌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경솔히 넘겨서는 안 된다.
“주셨다고 내 것이다.”라는 속삭임에 속아서는 안 된다.
16.
우리에게 주어지는 속임, 두 번째는, “욕심을 부려야 얻는다.”는 생각이다.
13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4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7.
어떤 광고를 보고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연인이 서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묻는다.
“오빠, 나 요즘 좀 살찐 것 같지?”
남자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린다.
“어.... 쪼끔...”
그러자 여자가 화를 내면서 말한다.
“지금 나 살쪘다고 놀리는 거야? 그래서 싫어졌다는 거야??”
광고는 그 장면에서 다시 뒤로 돌아간다.
그리고 여자가 묻는 장면에서 다시 시작한다.
“오빠, 나 요즘 좀 살찐 것 같지?”
남자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린다.
“어.... 아니?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아...”
그러자 여자가 화를 내면서 말한다.
“오빠에게 실망이야...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어?”
18.
어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곤란한 질문들을 쏟아내신다 생각한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한테 왜 그러세요?”라고 불평한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그렇게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19.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자립과 자발성을 높이기 위해 무감독 시험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시험에서 학생이 컨닝을 하다가 발각이 되었다.
이 학생에 대해 징계를 내리려 하자 학생은 이런 논리로 반발했다.
“내가 감독이 있었으면 컨닝을 하지 않았을텐데 감독을 두지 않아서 컨닝을 하고 말았으니 책임은 학교에 있는 것이다.”
20.
선악과 사건을 중심으로 전과 후가 선명하게 달라져 버렸다.
선악과 사건에 무엇이 있었는가?
바로 “욕심”이다.
그 전에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욕심 있기 전의 하나님 다스림은 사랑이었으나,
우리 안에 욕심이 생긴 이후의 그분의 다스림은 간섭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욕심이 문제다.
22.
어제 씽씽마치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이 물었다.
“이단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할까요?”
지난 주, 수련회에서 이단에 대한 문제점을 토론하고는 내게 질문한 것이다.
그 질문에 단편적인 즉답보다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찰나, 느닷없이 예은이가 먼저 대답을 한다.
“공부해야지... 이단에 대해서 알아야 돼!”
그렇게 즉답을 할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다른 대답을 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예은이가 이어서 말을 한다.
“그런데 주님을 알면, 성경을 알면, 하나님을 온전히 알면 분별할 수 있는 거야...”
이 녀석이 아직 신학교도 가지 않았는데 신학생인 척을 한다.
나는 이어서 위조지폐를 분별하려면 위조지폐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폐를 잘 알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23.
하나님의 통제?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시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내 안에 욕심이 문제다.
내 안에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사랑은 간섭이 되고,
내 안에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다스림은 통제가 된다.
내 안에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귀찮은 계명이 되고,
내 안에 욕심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생각은 낡고 어리석은 규율이 된다.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다스림은 정비례한다.
나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벗어버려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당신의 욕심은 결단코 당신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저 죄와 사망을 낳을 뿐이다.
24.
기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통로다.
그러나 그 통로에 욕심이 개입하면 그 통로는 막히고 만다.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져도 그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욕심이다.
이 땅에서는 욕심을 부려야 얻는다고 믿는다.
어린 아이를 키우다보면 공부에 욕심을 내는 아이가 있다.
이런 아이들이 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 속지 말라.
그 욕심은 결코 공부에 그치지 않는다.
25.
정글에서는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짐승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그렇게 잡아먹어도 약한 동물이 멸종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강한 동물들에게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냥하는 것은 부를 축척하기 위함이 아니다.
26.
이에 비해서 인간은 먹고 쓰기 위하여만 사냥하지 않는다.
쌓아놓기 위하여 사냥하고, 그 쌓아 놓은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냥을 한다.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씨가 말릴 때까지 사냥을 한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는 남는 것이 없다.
이게 진짜 짐승 아닌가?
그것이 욕심이다.
27.
남을 돕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아는가?
내가 지금 남을 돕는다고 그 사람에게 당장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남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착한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나의 욕심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게 가진 것을 나누는 일, 이것이 내 안의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28.
부자가 더하다는 소리 들어 보지 않았는가?
우리 생각에는 좀 있으면 남도 돕고, 부족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다.
욕심이란 것이 작용하면 단 한 푼도 나누지 못한다.
재물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문제다.
속지 말라.
욕심으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우리의 욕심과 바람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실력은 내 욕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하라.
그것이 믿는 자의 실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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