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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가만히 있지 말고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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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지 말고 외쳐라. 


욘1:1~2

1    주님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1.

지난 7월부터 지난주까지 우리는 사사기를 묵상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성경을 배경으로 설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설교가 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소위 주제설교나 강해설교라는 카테고리로 설교의 방법론을 규정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주제설교는 종교적 담론을 성경을 인용해 전하는 것이고요.

강해설교란 성경의 의미와 배경, 그리고 메시지에 중점을 두는 것이죠.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저는 강해설교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는 설교가 딱히 강해설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마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게 통용되는 강해설교라는 것이 성경공부에 가깝기 때문이죠.

보통 강해설교가들은 성경을 분석하고 의미를 파악하는데 주력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강해설교는 좀 달라요.

지난주에도 말씀 드렸지만 성경은 문자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 말씀드리면 오해를 하실 지도 모르는데요.

성경의 문자와 활자이라는 것이 무슨 경건이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성경책을 함부로 다루지도 않았어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성경책이 신주단지는 아니잖아요.

성경의 문자가, 성경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살아있는 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바로 우리가 성경의 살아있는 활자, 문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되죠.

저는 강해설교가 바로 그런 해석과 적용 아래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를 해 왔어요.

그래서 약 3,000년 전의 사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고, 우리가 마땅히 고치고 해야 할 일을 상고하는데 노력했습니다.


2.

거친 언어로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예배는 살풀이가 아닙니다.

굿이나 살풀이는 사람에게 있는 액살을 풀어주는 의식이죠.

마치 예배를 살풀이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자신에게 덮어져 있는 죄를 씻고, 복을 비는 의식으로 말이죠.

물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씻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덮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서죠.


3.

보통 설교를 예배의 백미라고 하는데요.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슨 목회자의 권위 때문이 아니예요.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설교는 영적 선동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설교자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하워드 요더입니다.

그는 또한 이런 말을 했어요.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회와 현상과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4.

우리교회는 설교한 내용을 가지고 목장모임을 나누잖아요.

그것은 제 생각이나 사고를 여러분에게 심으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설교의 말씀이 내 삶에서 녹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설교는 추상적으로 들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이들 앞에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오해했어요.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야욕을 위해 그 말씀을 도용했고요.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무슨 철학교수의 말처럼 추상적으로 들었어요.

만약 그 말씀이 그들의 삶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오늘부터 읽게 될 요나서에는 요나의 사명이 나와요.

그는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죠.

니느웨는 요나에게는 적국의 땅 한 가운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북한 땅 평양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불의한 기득권 세력의 한 가운데일 수도 있어요.

그곳에서 설교하라고 하셨는데요.

그 설교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 설교를 추상적으로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요나는 니느웨사람들에게 당장 회개하라고 외쳤는데요.

그들이 그 말씀을 그저 목사가 하는 소리로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말씀이 여러분은 평범하게 들리십니까?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적용하면 어때요?

매주일 선포되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마지막 경고라면 어떨까요?

그 말씀이 지금 당장 너의 생각을 바꾸라고 하시는 말씀이면요.

그런데도 매주 듣는 이야기로 여러분이 듣고 있다면요?

그래서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이 영적으로 멸망하고 있다면요?


5.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수많은 풍문들이 하나하나 사실로 규명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너무 기막혀서 도저히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지경이에요.

황당한 현실에 아마 여러분들도 어안이 벙벙할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 이야기들 중 여러분에게 충격을 주는 것들은 다 다르겠죠.

제게는 그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아픈 이야기는 이거였어요.

한국사회를 뒤흔든 최씨 모녀가 강남의 교회들을 다녔다는 보도 말이죠.

자세히 읽어보니 꽤 오랫동안 여기저기 교회를 다녔던 것 같아요.

어느 교회는 교회 리모델링을 해 주었다고도 하고,

선교헌금도 많이 해서 교회가 다 알 정도였다는 거예요.

아마도 돈으로 교회에서 행세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들이 왜 교회를 다녔는지는 논외로 하고요.

제 안에 문제는 그들이 교회에 다닐 때 그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였어요.

교회 출석 전과 출석 이후에 그들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그들은 열심히 감사헌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딸을 위해, 혹은 건물 매각을 위해 기도와 감사헌금을 했어요.

그것이 굿이나 살풀이와 무엇이 다른가요?

여러분은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요?


6.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교인 중에 미국 워싱턴 덜레스공항에서 일하는 분이 계셨데요.

그런데 한국에서 중년의 남자들이 단체로 50명쯤 왔는데요.

그들이 한꺼번에 복도쪽 자리를 요구하더래요.

한 두 사람은 편의를 봐줄 수 있지만 전부다는 불가능한 일이었데요.

안된다고 하니까 그분들이 매니저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떨고는 돌아가는 그들 중 한분께 이분이 물었데요.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한국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슨 일로 워싱턴에 오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대답에 이분은 얼굴이 화끈했다는 거예요.

그분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는 한국에서 온 장로성가대인데 찬양공연을 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교인분이 목사님께 이런 말을 하시더래요.

공항직원들이 기피하는 3가지 직업의 사람들이 있다고요.

하나는 변호사, 두 번째는 교수이고, 마지막은 목사래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골치 아픈 분들이 많다는 거예요.


과연 교회 출석전과 교회 출석 후가 다르지 않다면 교회는 뭔가요?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가 다르지 않다면 그게 신앙일까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일까요?  


7.

저는 결국 말씀과 씨름하는 이들이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간구와 씨름을 합니다.

자신의 말, 자신의 생각, 자신의 의지와 씨름을 하죠.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씨름하고, 그분의 뜻, 그분의 의지와 씨름해야 하죠.

여러분은 오늘 무엇과 씨름하실 것입니까?

여러분의 간구나 바람과 씨름하실 건가요?

분명히 선포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와 사명을 위해 씨름한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은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순리입니다.


8.

요나에 관하여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가 있으시죠?

그 스토리는 아마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그 명령을 피해 도망하는 요나의 모습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요나를 하나님은 기어코 니느웨 도성에 세우십니다.

큰 의미의 요나 스토리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에 직면하게 될까요?

요나서의 처음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욘1:2,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9.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죄가 참을 수 없을 만큼 관영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악이 심히 컸을 때도 하나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히브리인들의 고통도 하나님은 들으셨고요.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하신 줄 아십니까?

바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의인 10명을 찾으셨고,

이집트를 향해서는 모세를 찾으셨습니다.

니느웨를 위해 요나를 찾으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 성읍이 얼마나 악한지는 이 구절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3장에 가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욘3:8b,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10.

나쁜 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다르코 하라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뿐만 아니라 양심을 저버린 모든 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짓과 속임수, 치부와 착복 등의 악입니다.

또한 폭력이라고 번역된 [하마스]는 그야말로 힘으로 누르는 폭력입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니느웨는 양심을 팔아먹은 도시였던 것이죠.

말만하면 거짓을 하고, 권력을 동원해 부정입학에, 부정학점에, 재벌의 발목을 비틀어 돈을 뜯어내고, 재벌은 그 돈으로 자신의 사익을 추구했던 것이죠.

정의를 외치고,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종북으로 매도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가두고, 때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슬퍼하기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사회였던 겁니다.


11.

그런 사회를 향해 하나님은 요나에게 어떻게 요구하셨다고요?

“그 성읍에 대고 외치라”고요.

‘외치라’는 말보다 먼저 우리는 ‘대고’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성읍에 대고”에서 ‘대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알]이라고 하는데요. 

이 [알]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against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반대하라’, 혹은 ‘저항하라’, ‘싸워라’는 의미인 셈이죠.

그들과 싸워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12.

저는 오늘 여러분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한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 앞에 한 목사님이 글을 썼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존경받고 영향력이 있는 목사님의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혼란 앞에서 신앙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언급했는데요.

그분의 말에 저는 큰 충격을 받을 만큼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이럴 때일수록 신앙인은 가만히 주님만 바라보고 영성일기를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영성일기를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하시는 분이라 그 말이 이해는 갑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걸어야할 우리의 미래입니다.


14.

우리 인간은 영과 육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마음을 얼마나 아는가는 영성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죠.

성경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목사님이 말한 대로 영성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성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이 우리를 통해 살아나듯이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 이 땅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성을 이 땅에 선포하는 존재에요.

아무리 영성이 있어도 선포되지 않는 영성은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15.

가령 여러분들이 아이큐가 뛰어나고 들은 학식이 많다고 해보세요.

여러분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요?

그 지식, 그 똑똑함 누가 압니까?

그리고 무슨 소용이 있나요?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남에게 주려고 있는 거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성을 주신 이유는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함이에요.

우리가 영성이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용기 있게 선포하기 위함이죠.

불의한 사회에, 부정의한 인류에 공의와 정의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 말이죠.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다 순교한 게 아닙니다.

이 땅의 불의와 세상의 가치관에 맞서 하나님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노예를 풀어주고, 황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순교한 거예요. 

영성이 충만하다는 것은 혼자 방언 터지고, 혼자 성경지식 쌓는 게 아니에요.

영성이 충만하다는 것은 불의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충만하다는 것은 거짓과 불평등에 반대하며 싸우고 외치는 거예요.


16.

여러분이 건물을 짓는 건축가라고 생각해보세요.

이 곳에 교회의 건물을 짓는다고 행복한 상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은 제일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시멘트와 모래를 썩고 벽돌을 쌓아 올리시나요?

정상적이라면 아마도 제일먼저 청사진을 그리고 설계도를 그릴 겁니다.

설계도가 없는 건물은 없어요.

있어도 그 건물은 부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설계도라는 것이 뭘까요?

바로 생각 아닙니까?


17.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이죠.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께는 설계도가 있으셨어요.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죠.

영성은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생각만 있으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분이 이 땅을 창조하지 않으셨으면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생각이 곧 행동이셨습니다.


잊지 마세요.

영성은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생각과 행동이 같이 수반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영성을 강조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초기기독교도에도 있었고, 중세에도 수도원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에 대한 문제에 천착했을 뿐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어요.

그것이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허울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영성만 강조하면 종교성에 빠지고 맙니다.

죄송하지만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 영성은 하나님의 영성이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과 뜻을 드러내지 않는 영성은 영성이 아니죠. 

하나님은 그 말씀 속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할 사명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18.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미국인 초빙교수가 계셨어요.

유명한 분이셨는데 그분을 직접 초빙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의 아들이 저와 친구인데 현재 이화여대교수로 있죠.

그런데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도 절친이고, 한국에 계실 때도 자신과 그의 가족이 매우 가까웠데요.

그러다가 이 친구가 그 교수님이 계신 미국대학으로 유학을 갔어요.

한번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나오는데 거기에 그 교수님의 부인이 일을 하고 계시더래요.

너무 반가워서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했데요.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부탁하라고까지 하면서 반겨주더래요.

그런데 헤어져서 도서관을 나가려고 하는데요.

그 교수님 부인이 자신을 붙잡더래요.

그리고 하는 말이 가방 좀 보자고 하더래요.

그 도서관 규칙에 출입하는 학생의 가방을 검사하는 게 있었나봐요.

이 친구는 그게 너무 황당하더래요.

자신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책을 훔쳐갈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검사를 하겠다고 하니 기분도 상하더래요.

그런데도 그 교수님 부인은 해맑게 검사라고 해맑게 웃으며 건네주더래요.

친구는 친구고 규칙은 규칙인 거죠.


19.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어지럽지요?

나와 상관없어 보이고, 이해도 가지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친구들도 있고, 살아온 관계도 있지만 아닌 것은 아닌 거예요.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저 친구라고, 내가 뿌리박고 사는 사회라고 좋은게 좋은 거다 두루 뭉실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로 공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웃사랑을 여러분의 몸으로 외쳐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몸으로 외쳐보셨어요?

영성이 충만하면 이웃을 사랑하고 관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성이 충만하면 내 안에 가득한 주님 말씀을 몸으로 선포하게 되어 있어요.

영성이 충만하면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아요.

영성이 충만하면 자기만 생각하지 않아요.

영성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행동을 멈추면 영성도 멈춥니다.

공의를 향한 마음을 닫으면 영성도 닫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홀연히 일어나 주님의 마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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