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묵상07] 프레임전쟁
욘4:1~4
1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2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
2.
오늘 설교는 제게 많은 고민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계속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거부의 이유는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위험이나 사역 실패에 대한 부담 때문이 아니었죠.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성공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자신의 사역이 성공한다는 것은 니느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적국인 니느웨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니느웨의 구원은 곧 자신들의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참, 복잡 미묘한 상황이죠.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불평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3.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본문을 많이 읽어보는 편인데요.
그리고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합니다.
심지어는 꿈에도 그 설교가 생각날 정도니까요.
그렇게 많은 고민 가운데 설교가 태어납니다.
사실 들어보면 제 뭐 건질 거 하나 없는 설교라서 이 말이 안 믿기실거예요.
그래도 제 딴엔 처절한 고민과 묵상가운데 태어나는 설교라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교의 흐름이 잡혔어요.
이런 요지의 설교이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때론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 불이익을 넘어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주제의 설교였습니다.
4.
늘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설교로 선택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터라 최근에는 가급적이면 쉽고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해왔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스마트한 설교가가 아닌 관계로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읽을수록 다른 생각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물론 그 생각이 명쾌하게 제 머리에 들어왔다면 좋았을텐데 그냥 희미하게 제 뒷덜미를 잡고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끝내 설교의 주제를 바꿨어요.
5.
죄송하지만 오늘은 설교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고민을 나누는 자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양해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유능한 설교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설교를 하는데 있어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니죠.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중요한 철학은 설교는 주입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치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또한 안다한들 어찌 하늘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 가지고 다 표현할 수가 있겠어요.
저는 설교란 영적 고민들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요즘 관심하고 있는 교육시스템이 있는데요.
핀란드교육입니다.
최근 핀란드교육부는 교육체계를 전면 개편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업시간이 따로 있죠.
국어, 영어, 수학 이렇게 나눠져 있는데요.
핀란드교육부는 이 모든 구분을 없애버렸습니다.
국, 영, 수의 수업 구분이 없고, 모든 것을 통합해 교육하는 시스템이죠.
그리고 교사의 수업방식도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에 그치죠.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찾습니다.
7.
주입식교육에 익숙한 우리들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시스템이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에는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으니까요.
그 사고방식은 어른은 아이보다 더 낫고, 더 옳다는 편견이 자리하죠.
많이 배운 사람은 적게 배운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사고가 자리합니다.
지난 수요영성예배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에게 질문해야 한다고요.
이것을 “의문”이라고 하는데요.
우리의 의문이 답을 찾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질문을 하지 않아요.
의문을 품는 것을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의문을 갖지 않는 답이 주입식이죠.
우리는 그것을 그냥 믿습니다.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하죠.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얻은 답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냥 순종한 것 같죠?
그는 늘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앞두고 하나님께 집요하게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은 씨름까지 하면 그분에게 답을 찾았어요.
문제는 의문을 품고도 답을 찾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이죠.
8.
오늘 저는 저의 의문들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고민을 나누려고 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서로 고민을 나누며 진리를 찾아가보죠.
먼저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김제동동영상]
9.
여러분은 저 동영상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정말 김제동씨 말대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여기면 안 될까요?
왜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언가 결과를 내야하는 거죠?
언제부터 우리는 생산성의 사람으로 인간을 평가하기 시작했을까요?
10.
프레임전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어요?
이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은 UC버클리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교수입니다.
그는 인지언어학이라는 학문의 창시자이기도 하죠.
그는 자신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저서에서 프레임을 설명합니다.
프레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틀이라는 뜻인데요.
인간은 언어학적으로 어떤 틀을 만들어 그 틀 안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이죠.
가령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00년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조지 부시와 엘 고어의 싸움이었어요.
이전 클린턴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일하며 인기를 얻은 엘 고어의 승리가 점쳐진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조지 부시의 승리였습니다.
이런 결과의 차이는 아주 작은데서 왔다는 것이 선거전문가들의 견해죠.
그 차이가 무엇이냐면 바로 세금정책이었어요.
엘고어의 세금정책은 [세금감면]이었습니다.
반면 부시의 세금정책은 [세금구제]였던 것이죠.
이 둘의 정책적 차이가 있느냐하면 “없습니다.”
단지 언어적 차이만 있을 뿐, 그 내용에 대한 것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지 부시의 세금정책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어요.
세금감면이라는 말은 그저 세금을 깎아주는 것에 그친 반면에
세금구제란 마치 고통 속에서 영웅이 나를 구해주는 것을 생각하게 한 거죠.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영웅주의가 팽배한 미국사회에서는 구제라는 말 속에 나를 그 고통의 늪에서 구해줄 영웅으로 정책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것이 프레임인 것이죠.
그의 책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제목이 흥미롭죠?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은 코끼리를 잊으라는 뜻인데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의미죠.
그것이 프레임입니다.
11.
그런데 이 프레임이라는 개념은 최근의 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죠.
언제일까요?
바로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는 그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죠.
그런데 사탄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지시킵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이라는 전체 프레임을 선악과라는 프레임으로 바꿔버리죠.
그 프레임에 빠진 인간은 선악과 앞에서 에덴동산을 잃고 맙니다.
마치 작은 욕심 앞에서 전체의 은혜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런 황당한 결정은 바로 프레임전쟁에 있습니다.
12.
한국교회는 현대사회의 지탄의 대상입니다.
교회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습니다.
어느 통계에 보면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긍정이미지가 50%가 안 된답니다.
소위 제조회사에서 상품을 출시할 때 호감도가 70%를 넘지 못하면 출시를 할 수가 없다고 하죠.
이런 기준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 출시불가 제품인 거죠.
교회와 기독교인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기심과 언행불일치에서 비롯한 거죠.
그런데 사실은 정말 그럴까요?
정부통계에 의하면 사회복지와 관련된 단체가 2,343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카톨릭이 감당하는 단체는 전체의 26%이고, 불교는 14%인데 비해 개신교가 이끄는 단체는 60%에 이릅니다.
장애우를 돌보는 단체 또한 전체의 66.3%이며,
아동복지시설은 전체의 72.3%, 노인복지시설은 전체의 44.9%에 달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이끄는 것도 카톨릭 87개, 불교 55개에 비해 개신교는 488개교에 달하죠.
그럼에도 왜 한국기독교는 이기주의의 산물이 되었을까요?
프레임을 잘못 선정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마치 선민처럼 구는 프레임에 빠졌기 때문이죠.
13.
우리에게 이 프레임전쟁이 왜 그리 중요한지 아세요?
사탄의 도구이기 때문이죠.
가정의 아픔은 아버지의 틀을 잘못 만들어버리고,
상처는 사람의 틀을 삐뚤게 만들어 버리죠.
잘못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온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는 거죠
우리는 프레임의 전쟁터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프레임을 가져야 하는데요.
이 땅에서는 언제나 세상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끌어드립니다.
14.
죄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죠.
그 뜻은 과녁을 빗나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빗나가는 것,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죄는 그런 생각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개인적이고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측면에 머뭅니다.
죄인이라 하면 우리는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떠올리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우리는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본질은 잃고 다른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 되죠.
15.
오늘의 본문은 저에게 심각한 프레임의 고민을 던져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요나서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관심은 요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니느웨에 있으시죠.
심지어는 요나의 나라는 그 니느웨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지금 니느웨를 구원하십니다.
그것도 요나를 통해서 말이죠.
참 얄궂은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런데요.
요나서는 단지 니느웨에 대한 관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를 기억해 보세요.
배 바닥에서 자고 있는 요나보다 뱃사람들이 훨씬 능동적으로 일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요나보다도 나은 믿음을 보입니다.
이에 비해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이 모습 가운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반응에 비해 니느웨의 반응은 획기적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에 의해 하나님의 낯을 피했지만 니느웨는 엎드렸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는 요나의 순종만큼 어려운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적대적 신이었기 때문이죠.
그 하나님의 명령에 엎드리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래서 누가 구원에 이르렀냐는 것입니다.
누가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았느냐는 것이죠.
외람되게도 그게 그리스도인 니느웨가 아니라 여전히 이방인 니느웨입니다.
16.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가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프레임은 어떤 것인가요?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요?
주님을 영접한 사람인가요?
주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요?
17.
지난주, 우리는 정치적으로 불행한 사태에 빠졌습니다.
너무도 불법적인 현실 속에 국민들의 분개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토요일 저도 광화문의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들 시위가 아니라 축제처럼 너무 아름다운 모습들이었어요.
거기서 제 귀에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자”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아모스선지자의 말입니다.
암5:24,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그들은 하나같이 이 땅의 정의를 외치고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일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흐르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보시면 어떻게 하실까?
요나서에 빗대어 하나님은 적어도 이들을 니느웨처럼 보시지 않을까?
그리고 제 안에 강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교회 잘 다니는 착한 사람을 그 프레임으로 하고 있지는 않았나?
18.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프레임은 교회라는 틀에서 우리를 재단합니다.
교회에 다니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죠.
좀 더 더 나아가면 성경을 읽는가? 예배를 드리나? 기도를 하나?로 말이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프레임은 무엇일까요?
만약 그런 프레임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공들처럼,
하나님의 호소 앞에 자신의 옛 과거는 다 버리고 엎드린 니느웨처럼,
행동하는 자에게 있다면 어떨까요?
19.
저는 오늘 본문에서 참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구나하는 생각 말이죠.
내가 짜놓은 프레임으로 세상을 봤구나 하는 생각이요.
편견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을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아닌 나의 생각을 가진 프레임으로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는 것이죠.
그것이 편견입니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 맞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분의 뜻에 오늘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지도 몰라요.
아무리 마음대로 살았어도, 그 말씀이 있는 순간 무릎 꿇는 이에게 구원이 임하는지도 모릅니다.
20.
저는 지금껏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을 세상의 프레임으로 바라 본 것이죠.
요나의 오늘 본문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프레임은 다르다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안에 영적인 고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서 있는 자리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교리를 지키며, 그저 착하게 살았습니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해왔고요.
그러면서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구분이 나와 다르실 수 있다는 거에요.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요나처럼 늘 불순종하는데요.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 말씀을 그리 강하게 받지 않는데요.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문제시 하지 않거든요.
요나처럼 말이죠.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건 비그리스도인이건 중요한 것은 매 말에, 내 명령에, 내 뜻에 지금 엎드리는 자라고 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먼저된 자가 나중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게도 묻고요.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계세요?
여기 나온 수고로 증명하시나요?
아니면 그분의 말씀, 요나처럼 듣기도, 따르기도 힘든 명령에 순종함으로 증명하시나요?
21.
마지막으로 에밀리 디킨스의 시 한편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만약 내가 ...
만일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만일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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