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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나서묵상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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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묵상08]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욘4:5~6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6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1.

우리는 2016년 마지막을 요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주 성탄주일까지 하면 요나서는 9회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요나서를 묵상하면서 저는 부제로 [요나에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묻다]라고 정했습니다.

2,800년전, 지금 우리들과 비슷한 처지의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고, 더욱이 극심한 권력자의 악행이 판을 치던 시대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우리는 몇 가지 뚜렷한 사실들을 밝히며 묵상했는데요.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죠.

우리들은 주님의 스피커들입니다.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스피커인데요.

이 스피커는 전기적 자극을 받아 소리로 변환시키죠.

소리로 변환시킬 때 스피커는 온몸을 떨어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한 성품을 이 땅에 소리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사야40: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40:3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이 예언의 소리를 붙잡아 실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이죠.

그는 자신을 "I am the Voice"(나는 소리다)라고 정의했습니다.  


2.

뿐만 아니라 요나는 우리에게 내려놓음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겸손을 말하고, 내려놓음도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도, 재산도, 명예도 내려놓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가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내려놓기를 원하시죠.


3.

최근 사회적 문제도 많지만 교회적으로, 특히 선교적으로 많은 문제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유래가 깊은 유수의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의 일탈이 도마에 올랐죠.

수십년을 선교사로 사역해 왔지만 결과는 재물갈취와 성적 타락이었어요.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재산과 시간과 인생을 드렸을지 몰라요.

그러나 정작 자신을 드리지 못한 것이죠.


4.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고민합니다.

시간과 월급과 자신의 재능도 드리는데요.

물론 그것도 미적미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드려야 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드려야 하고, 미움과 갈등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고민과 갈등은 내가 누리고자 하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5.

한사람의 실명을 콕 집어서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공직자는 모든 사람들의 모델이기에 실명을 거론해도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물론 그분의 모든 걸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어요. 

언론보도에 따른 사실관계 속에서만 말씀드리는 것이니 이해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비춰보면 좋겠어요.

최근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는 황교안총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분은 법무부장관을 지낸 법관출신입니다.

법을 전공하셨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분은 법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공부하셨는데요.

그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직도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쁜 시간들을 쪼개서 신학을 공부하고, 또 전도사로 봉사도 하니 대단하죠.

미국의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시절에도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죠.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까요?

시간이 없어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공부했다고 하죠.

여러분은 이렇게 할 수 있으신가요?

황교안총리는 정말 충성스러운 주님의 자녀 같아 보입니다.


6.

그런데 말입니다.

그분이 총리에 임명된 이후 의전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서울역 플랫폼까지 차량이 들어와서 기차 옆에 세웠다는 것이죠.

행정관청이 있는 세종시 오송역에서는 버스정류장에 버스를 물리고 의전 차량을 주차시킨 사실이 있었답니다.

한번쯤은 의전 비서관들의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두 번은 아니죠.

최근에는 국회를 방문하면서 총리가 아닌 대통령 대우 의전을 요구했다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시간도 내고, 열정도 냅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심과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망들은 내려놓지 못한 것이죠.

오히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작은 복채를 내어놓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태도는 신앙이 아니라 샤머니즘입니다.

바로 작은 열정을 내놓고, 큰 욕망을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딱 우리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신앙관이죠.


7.

오늘도 마찬가지로 요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오늘 제목처럼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3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로 들어와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반나절만에 니느웨 사람들은 뜻밖에도 모두 긍정의 반응을 보입니다.

4장에 들어와서 요나는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죠.

니느웨가 구원받지 않기를 바랬던 요나로서는 당연한 반응인지도 몰라요.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줄 알았다고 투덜거립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요나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긴 했지만 자신의 마음에는 탐탁치 않았다는 것이죠. 


8.

우리도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누군가와 싸우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적 있으세요?

언제나 상처를 받거나 아픔이 있으면 피해자는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자신이죠.

자신이 피해자인데 용서는 누가 빌어야 할까요?

물론 상대방이죠.

그런데요.

하나님은 꼭 나에게 손을 먼저 내밀라고 하시죠.

내가 먼저 마음을 열라고 하세요.

그런 요구를 받으면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요.

그래도 명색이 주님의 자녀인데 이런 마음이 많이 들면 하긴 해야죠.

전화를 들고 겁니다.

그것도 한참 뜸을 들이다가 전화를 하는데요.

전화벨이 울릴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받지 마라... 받지 마라..... 하죠.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바로 끊고는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고 우기기도 하죠.

전화를 받았다고 해도,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죠.

내가 용서를 빌었는데 상대방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죠.

더 열 받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먼저 손 내밀었는데 저쪽에서는 그게 당연하데요.

이럴 때 부하가 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죠.


9.

여러분, 그거 아세요?

우리는 상대방이 있잖아요.

그와 문제, 그와 관계를 하는 것 같죠?

그것은 세상의 상담학에 속한 영역이죠.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상대방을 무시하고 하늘의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바로 지금 나의 상대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니가 잘못했지...”라고 하면 맞잖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잘해도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10.

아무튼 요나는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고는 성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맞은 편 동쪽에 움막을 짓고 앉았어요.

니느웨성에 어떤 일이 벌어지나 보려고 한 것이죠.

요나가 왜 그곳에 움막을 지었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유추하기는 아마도 니느웨가 하나님께 구원받는 장면을 보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11.

혹시 그럴 때 있으세요?

이웃을 위해 기도하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 기도했어요.

그런데 이웃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정말 보고 싶으세요?

아마도 우리 마음에는 이런 움막이 많은지도 몰라요.

기도는 했는데요.

기도대로 되기보다는 내 마음의 심정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12.

이런 복잡미묘한 감정을 한꺼번에 갖고 요나는 앉았습니다.

오늘 나눌 이야기는 이제부터에요.

6절을 같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욘4:6a    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자라 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이 대목을 개역개정판으로 다시한번 읽기를 원합니다.

욘4:6a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13.

오늘 본문에서는 중요한 단어 2가지가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괴로움”이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개정개역을 읽자고 한 이유는 그 단어가 새번역에는 없기 때문이죠.

새번역은 이 단어를 “편안케 해 주셨다”는 말에 녹여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요나가 움막을 지은 곳은 높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성읍을 내려다보아야 하니까요.

게다가 시기는 아마도 강한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본문에는 그늘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박 넝쿨을 마련하셔서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셨죠.


14.

참 재미있어요.

하나님이 마치 부모 같습니다.

어릴 적에 상민이가 제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게 가슴 아파 밤에 상민이 자는데 맞은 곳에 약을 바르며 운 적이 있어요.

상민이가 잘못해서 받은 아픔인데 부모가 더 아픈 거 있죠.

하나님이 그래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여 풍랑을 만났는데 요나는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죽겠다고 바다에 뛰어들죠.

그런데 그게 아파서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주십니다.

하나님께 투정부리고 씩씩거리며 산에 올랐는데 주님은 그늘을 마련하세요.

그게 우리 하나님이에요.

내가 비록 잘못된 길을 가도 나를 돌보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에요.


15.

그런데 제가 주목한 건 한낱 뙤약볕을 요나가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거예요.

그 단어가 “괴로움”입니다.

이 단어는 요나서 다른 곳에도 숱하게 사용된 적이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요나서 1:7과 3:10이에요.

욘1:7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욘3:10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16.

위의 구절에서 재앙이라는 단어가 바로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아십니까?

앞서 재앙이라고 쓰인 일들이 어떤 일인가요?

뱃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건이 일어난 일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멸망에 이르는 사건이에요.

이에 비해 요나는 어떻습니까?

고작 뙤약볕 하나가 자신의 재앙이라고 소호하고 있죠.


17.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이런 요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불편이 어떤 이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고통보다 크다고 느끼죠.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으려 듭니다.

어떤 영화의 명대사처럼,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모욕감 하나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목숨에 버금가는 것을 요구하죠.

자신의 체면, 의전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추위에 떨어도 되는 거죠.


18.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말 잘 물어보고, 또 많이 들으시죠?

우리는 신앙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죠?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고 자랑 하기 앞서 우리가 구원을 논하고 말하는 순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마치 ‘나는 살았다’라는 말에는 ‘누군가는 죽었다’는 말이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강남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간증이 차고 넘쳤죠.

“한발만 더 들어갔으면 나도 죽었을 텐데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요.

이게 깊은 신앙처럼 보이죠?

그런데 사고로 죽은 이들은 그럼 하나님이 죽이신 건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다른 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살아서 기쁘다”는 관점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지금 아프다”를 보는 관점을 지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눈물지신 것 아닐까요?

자신의 보좌에 만족하신 게 아니라 아픈 우리들에게 마음 쓰신 것 아닐까요?

그렇게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면서 말이죠.


19.

다른 이들의 생명보다 앞선 신앙은 없어요.

우리의 신앙이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요.

다른 사람을 저주할 신앙의 자유 또한 없어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저주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나의 작은 불편을 재앙이라 떠벌이지 마세요.

나의 작은 고민과 괴로움을 마치 다른 사람의 생명과 같은 재앙이라 여기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미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진 것을 감사하시고, 있는 것을 나누세요.


20.

두 번째 단어는 “크다”라는 단어입니다.

6절 하반절을 다시 읽어보죠.

욘4:6b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것도 개역개정판으로도 읽어보겠습니다.

욘4:6b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21.

요나는 뙤약볕으로 괴로울 때 박 넝쿨로 인해 그늘을 만납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마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만큼 기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크게 기뻐하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뭐 별 이상 없는 표현이고,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요나는 잠시 전 어땠습니까?

니느웨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게 내리신 재앙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죠?

몹시 언짢고, 못마땅해서 화를 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요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박 넝쿨 그늘은 뛸 듯이 기뻐하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른 사람에게 임한 행복에는 크게 언짢아하면서 자신에게 임한 행복에는 그토록 기뻐하는 모습 아닙니까?


22.

“크다”라는 단어 속에는 요나가 얼마나 편협한 신앙인인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들도 다르지 않죠.

우리들에게 임한 축복은 모든 신학적, 신앙적 용어를 사용하며 찬양하죠.

그런데 남에게 임한 축복은 그저 운이 좋아서, 아니면 잘못된 방법으로 취득한 것쯤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2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인애와 풍성한 자비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하나님은 철저히 자신들의 부족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다른 이들,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는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아니 미치지 말아야 하는 편협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호와는 온 천지의 주관자십니다.

모든 이들의 아버지시며, 그들의 복지와 행복과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만의 하나님, 믿는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4.

정치적인 견해 하나를 말씀드리고 마치고자 합니다.

종교인, 특별히 목사가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저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치적이시기 때문이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도덕적, 윤리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적, 제도적, 역사적인 것이죠.

그러기에 또한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뜻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 또한 정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치적 정의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어떤 주의, 어떤 이즘이 세상을 바꾸고, 삶의 질을 높이는지 저는 몰라요.

다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죠.

그래서 어떤 노선과 어떤 성향인 것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보도 보수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도 반대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제도나 사상이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요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현 상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최씨 때문입니까?

박씨 때문입니까?

아니요.

어느 시대나 그런 사람들은 꼭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도록 만든 제도나 사상들입니다.

바로 누군가만을 위해 살아가고 세력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모든 문제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재벌만을 위해, 권력, 특정한 세력, 계층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제도 말이죠.

모두 다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1%를 위한 사회가 아니라 99%, 아니 100%를 위한 사회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모든 이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죠.

교회가 이것을 잃으면 안 됩니다.

특별한 기득권층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25.

공무원이 왜 문제입니까?

그들은 공부도 잘하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 스스로를 잘 되게 하려고 한다면 사기업을 가야죠.

공무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기 위해 되는 자리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드려 섬기는 자리가 공무원의 자리죠.

그래야 정상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잘되려고 하나님 믿는 게 아닙니다.

먼저 믿었기에, 먼저 사랑 받았기에, 먼저 재능 주셨음을 알기에 그분의 자녀로 이 땅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나는 여러분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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