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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로마서묵상

로마서묵상07] 심판의 자리에도 축복의 자리에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사역이 아닌 내 영혼이고, 공동체가 아닌 단독자인 나다.(롬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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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묵상07] 심판의 자리에도 축복의 자리에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사역이 아닌 내 영혼이고, 공동체가 아닌 단독자인 나다.(롬3:1~8)

 

 


21세기에 들어서서 바티칸의 학자들 중 진보성향의 몇몇 학자들에 의해 가룟유다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일명 가룟유다의 복권운동이다. CNN 등에 의해 보도된 갸룟유다의 복권운동에 참여한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 또한 하나님 사역의 일부"라는 논리였다. 독일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을 정도로 가룟유다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가운데, 가룟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의 사건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룟유다의 행위도 정당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에 동참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러한 논리는 최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당시에도 이런 논리는 존재했다.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아야 하느냐?"(7절)는 논리들이 횡행했다.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하는데 천재적인 사람들의 궤변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 논리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가끔 나는 결과가 잘되었으니 과정에서 나온 과오나 잘못들은 문제시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는다. 용서라는 단어를 앞세워서 말이다. 물론 모든 일은 경중을 막론하고 용서의 그늘 아래 있다. 용서를 벗어나 있는 잘못은 없다. 다만 용서의 은혜를 구하면 용서는 누구나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나 단지 과정에서 나온 과오나 잘못을 용서하는 선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오와 잘못이 잘된 결과를 이끄는 동력이었다고 외치는 주장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상처를 주고도 준 상처로 인해 상처받은 이가 더욱 강건해질테니 오히려 상처 준 내가 상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듣는다. 고생시킨 나 때문에 네가 성공했으니 나에게 감사하라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이 한 잘못을 정당화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나의 과오와 잘못으로 출발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일을 이루게 하는,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가 분명 있다. 개인의 실수로 인해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지만 오히려 그 일로 결속을 다지고 더욱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실수와 잘못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용납은 용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납하시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고, 또 우리에게 용서받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지 그 잘못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단독자로 선다.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 들어가 있고, 참여하고, 또 그 공동체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누려도 주님 앞에 설 때는 공동체가 아닌 나, 단독자로 선다. 우리가 편승할 수 있는 구원열차는 없다. 우리의 잘못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회개해야하고, 용서받아야 하며, 또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가 한 사역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가지고 서는 것이다. 나의 사역으로도, 결과로도, 입술로도, 논리로도가 아닌 나의 영혼이 그 앞에 선다. 나의 영혼 이외의 변명거리는 없다. 나의 논리나 율법이 하나님의 주권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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