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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삼서묵상일기

요한삼서묵상일기 6 - 모든 것을 좋게 여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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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1:9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일을 지난 월요일, 이 아침에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설명이 많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상황들이 담겨있기 때문이죠. 성경을 볼 때 먼저 배경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래야 온전한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고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묵상도 가능해지죠. 

 

먼저 첫 부분부터 걸립니다. '내가'는 사도 요한이죠. 사도 요한이 편지를 썼는데요. 그런데 그 '교회'에 편지를 보냈답니다. 이 교회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편지는 교회가 아니라 가이오에게 보내는 편지죠. 그러면 그 이전의 편지일까요? 그러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우리가 모르는 편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 편지를 쓰기 전에 어떤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으로 보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편지에 대한 '어떤 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상황을 조금 정리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어떤 일'로 인해 교회에 편지를 썼던 모양입니다. 그 편지를 누군가 전달했겠죠. 그리고 답신을 받아 왔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답신을 가져온 이가 가이오에 대한 소식을 전해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게 된 거죠. 그런 의미로 추측한다면 이 의문의 편지와 요한삼서는 연결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란 과연 무슨 일이었을까요? 이 또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조금의 추리력을 동원해야 하죠. 앞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했는데요.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가 낯선 신도, 그러니까 복음 전도자들을 환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죠. 이 부분을 특별히 사도 요한이 칭찬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죠.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연결이 되겠죠? 차분히 연결해 볼까요? 이제 추리력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어느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죠. 초대교회 가운데 많은 교회가 복음 전도자들을 후원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후원으로 전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유럽 선교의 교두보는 바로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 교회는 이를 거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가이오는 이 부탁을 들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끝내 거절을 선택했습니다. 그 중심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디오드레베가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추리를 하면 얼추 본문이 이해가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요한삼서를 통해 가이오도 칭찬하고 반면 디오드레베도 고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디오드레베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 그가 사도 요한의 요청을 거절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불분명하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만 그 해답을 찾는다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근거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는 부분에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이는 아마도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지위나 권세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듯하죠.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사도 요한의 간섭이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지위를 구축하고자 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교권다툼과 같은 일이죠. 이것이 발단이 되어서 거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저의 생각입니다.

 

권한과 지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합니다. 그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요. 또한 그 권위와 권한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측면이죠. 이를 권력의 양면성이라고 하죠.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권력을 사유화하는 경우들을 목격해 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도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사랑에도 양면성이 있죠.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순간에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좋다가도 모든 것이 나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분은 한순간에 결과를 뒤집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양면성이 드러나죠.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 나쁜 것을 선택하고 그 길로 들어서는 자는 끝없는 미궁에 빠지죠. 어쩌면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이나 지위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이 내가 잘나서 가진 것인 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인 줄 알 때, 사람을 살리는 메스는 남을 해하는 강도의 칼이 되는 것입니다. 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품은 마음, 내가 환대하는 것들이 문제입니다. 어떤 것을 보고,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인 거죠.

 

나에게 주어진 것들은 나를 믿고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내 자녀도, 내 직장도, 내 주위 사람까지..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알고 무시하고 버리고 저주하고 미워하면 믿고 주시던 주님의 통로가 닫히고 맙니다. 주로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함부로 하죠. 쓸모를 가르고, 가치를 판단해서 마음대로 정죄합니다. 그러면 나를 믿고 맡기신 주님의 손길이 막혀요. 반대로 어떤 아픔도 기쁨으로 승화하고, 어떤 슬픔도 기꺼이 즐거움으로 맞이하면 우리 손에는 점점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이 맡겨집니다. 그렇게 우리의 축복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에요. 그러니 주신 것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맡기신 것을 내 마음대로 하지 마세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아픔까지도 말이죠. 그렇게 모든 것을 좋게 여기세요. 모든 것을 기뻐하세요. 그것이 우리 안에 도사리는 선악의 양면성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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