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8:13~18 다윗은 돌아오는 길에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 죽이고, 이름을 떨쳤다. 그때에 다윗이 에돔에 주둔군을 두기 시작하여서, 온 에돔에 주둔군을 두니, 마침내 온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었다.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렇게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그는 언제나 자기의 백성 모두를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군사령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역사 기록관이 되고,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다. 다윗의 아들들은 제사장 일을 보았다.
이번에는 에돔입니다. 그동안 동쪽 모압, 서쪽 블레셋, 그리고 북쪽 시리아를 정벌한 다윗은 이제 남쪽의 에돔까지에 이르죠. 에돔은 아예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요. 그야말로 중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 왕 때가 가장 부강한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굳이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광개토대왕쯤 되려나요? 그는 동쪽으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하얼빈을 넘어 몽골에, 서쪽으로는 베이징까지 영토를 확장한 역사적이 기록들이 있죠?
그러나 다윗은 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군사적으로 광개토대왕 같은 업적을 이루었다면 정치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여겨지는 세종대왕과 같은 모습까지 보이죠. 한 마디로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쳐놓은 모습이라는 거죠. 이런 비교가 적절치는 않습니다만 이스라엘이 평가하는 다윗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비교하고자 한 비교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아무튼 다윗의 성군의 모습을 표현하는 글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이 구절입니다.
삼하 8:15 다윗이 왕이 되어서 이렇게 온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그는 언제나 자기의 백성 모두를 공평하고 의로운 법으로 다스렸다.
공평과 의로움이란 그 유명한 히브리어 '미슈파트'와 '체다카'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를 우리가 행해야 하는 '착한 일'이라고 정의했죠.
미 6: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슈파트는 한마디로 사회적 정의와 실천을 의미합니다. 차별과 사회구조적 모순에 침묵하지 않는 것을 말하죠. 가진 자는 자발적인 나눔을 통해 평등을 이루고, 연약한 자는 돌보고 이끌며 함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 그것이 미슈파트 정신입니다. 체다카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유대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저금통 하나를 마련해 준다고 하죠. 경제적 관념을 교육시키는데 탁월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죠.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저금통이 있다고 해요. 그것은 남을 위해 자신의 것 일부를 떼어내는 저금통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사용될 돈을 마련해 놓는 것이죠. 이 저금통을 그들은 '체다카'라고 부른다고 해요. 더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의 언어에는 자선이라는 말이 없다고 하죠. 누군가를 돕는다는 말이 없다는 거예요. 가장 비슷한 말이 '체다카'인데, 이것은 내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주는 의미가 아니라 가진 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는 뜻의 말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 말이 있죠? 다윗이 어느 곳으로 출전하든지, 주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다고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와 복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은혜와 복에 대해서 2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공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그는 예배와 십일조 정신을 표현했어요. 오늘은 공의를 백성들에게 드러내죠. 그것은 다름 아닙니다. 차별이 없고, 구별이 없으며, 누구나 똑같은 생명으로, 하나님의 창조물로 백성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웃사랑'이라고 하죠.
많은 사람들이 이웃사랑을 어떻게 하냐고 묻습니다.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느냐고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는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인종적, 경제적, 신분적 차별뿐 아니라 성별로도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죠. 여기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웃의 실수, 경험적인 사건으로 받은 상처, 관계의 어려움 등으로 정죄하고 낙인찍는 일을 멈추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라나듯 그도 자라날 것이고, 내가 변하듯 그들도 시간을 지나며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죠. 좋은 쪽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도 저는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의식에서 남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것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셈이죠.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돕는 과정은 조금 더 디테일합니다. 그것은 내 주위에 두시고 나를 통해 일하시기 원하는 때가 따로 있기 때문이죠. 그때는 또 그때의 마음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드러나는 나의 태도가 '체다카'이겠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갚는 방법이죠. 그것은 내가 그분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차별 없이 보시듯 우리도 남을 차별 없이 보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듯 나도 그 은혜를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찬양이고 예배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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